▲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당장 아프더라도
인간을 위기에 처하게 했던
고통들을 오히려 더 많이
증명하고 상기해야 한다.
잊자거나 없던일로 하자는건
터무니없고 안타까울 뿐

'먹어서 응원하자'. 놀랍게도 이 응원 문구는 곳곳에서 세계 공용어처럼 활용된다. 먹거리가 위험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누군가가 꼭 이 문구를 들고 나온다. 1990년 영국이 광우병으로 축산 농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다. 농무부 장관이던 존 검머씨가 방송에 등장해 햄버거를 삼키며 문제없으니 먹어서 농가를 돕자고 시민에 권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 동북지방 농수산물이 팔리지 않자 똑같은 응원 문구가 등장했다. '타베테 오엔시요우'. 아베 총리는 후쿠시마 쌀로 지은 밥도 먹어 보였다. 그곳의 문어도 씹어 보였다. 몇몇 연예인들은 게걸스러울 정도로 그 지역 과일을 먹는 모습을 연출했다. 먹어서 응원하는 모습들이었다.

이 응원은 농가, 지역을 향한 '의리있는' 일처럼 보인다. 고통에 공감하며 아픔을 쉬 잊게 해주는 위로의 작업인 것 같기도 하다. 의리있어 보이고, 힐링시켜 주는 듯한 이 응원은 액면 그대로 의미를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안타깝게도 그러긴 힘들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응원의 의미를 한 꺼풀만 벗기면 먹어서 돕자는 말은 무서운 정치적 속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무한 이윤을 내기 위해 공장형 축산을 택했고, 짧은 시간 내 덩치 큰 소를 만들기 위해 동물성 사료를 사용한 결과가 광우병 발병이다. 경제적 이득을 향한 인간의 무한 욕망이 재촉한 재앙이 광우병이었다. 후쿠시마 먹거리 사고는 강한 국가를 만들려는 일본의 경제·방위정책 결과가 빚은 재난이었다. 그런데도 먹어서 응원하자고 나선 것은 재앙을 기억에서 밀어내고, 재앙의 원인을 증언하지 말자는 주장에 가깝다. 원인을 따지는 일은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망각하고 살자며 원인 책임자들에 면책을 주는 발언이다. 그래서 먹어 응원하자는 말은 위안이 아니라 정치적 언어가 되고 만다.

덮어두자는 정치적 언어는 아픔을 배가시킨다. 증언과 기억을 멈추자는 언설은 말로 그치지 않고 가슴을 툭툭 치고, 애를 끓게 하는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변한다. 강제 성노예를 당했던 이들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일본의 작업을 우리가 폭력적이라며 분노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선 당장 아프더라도 인간을 위기에 처하게 했던 일들을 오히려 더 많이 증언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면 인간은 비인간적인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기억은 사람을 인간답게 하고, 망각은 인간을 그 반대로 살게 만든다.

가족을 잃고 고통을 받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도 먹어서 응원하자는 패거리가 나타났다. 더 많은 증언을 풀어내고, 더 오래 기억을 하자며 노력을 아끼지 않는 유족들 앞에 '이제 그만하자'고 떠든다. 큰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강짜다. 증언과 기억의 일단 정지를 요청하고 있다. 더 많은 증언을 이끌어내고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쪽에 이젠 까먹고 없었던 일처럼 살자고 권하고 있다. 그런 말을 건넬 자격을 가진 자가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인간답지 말자고 권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까먹지 말자며 붙잡아도 시간 앞에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기억이다. 그래서 어렵게 증언하며 기억을 붙들어 두려는 쪽은 늘 조바심이 난다. 우리가 인간이 맞는지를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락에 떨어뜨렸던 홀로코스트조차도 잊혀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유가족들은 알고 있다. 남은 자가 가라앉은 자에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와 책무는 증언하고 기억하는 일이라는 걸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같이 손을 맞잡고 증언하고 기억하길 돕겠다는 말 외엔 어떤 것도 그들에겐 무례다. 까먹기의 선수인 일본을 향해 온 민족이 나서서 분노하던 우리 모습을 조금이라도 상기해 보면 안다. 까먹자거나 없던 일로 하자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폭력인지를.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