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이 팽택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나이 마흔 한살이었다.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실은 중앙에서 내려 온 감독관 비위를 맞추는게 무엇보다 싫었다. 그는 "내 어찌 봉급 다섯 말의 쌀(五斗米)때문에 소인들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라며 20년간 시골에 은둔하며 살았다. 가난했지만 결코 부귀를 원하거나 급급해 하지 않았으며, 항상 문장을 짓는 것을 즐기고 세속의 득실에 연연하지 않았던 그는 떠나면서 그 유명한 귀거래사를 후세에 남겼다.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귀거래혜 청식교이절유 세여아이상위 복가언혜언구 열친척지정화 낙금서이소우)." 대충 번역하면 이렇다. "돌아가리라. 사귀고 어울려 노는 것도 이제 그만 두겠네.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다시 관직에 올라서 무엇을 얻겠는가. 친한 이웃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 음악과 글을 즐기며 시름을 삭이리라."

범려.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정치가다. 정치인은 앞으로 나갈 때와 뒤로 물러날 때가 정확해야 한다는 교훈을 안겨준 이다. 그는 친구 문종과 함께 월왕 구천을 도와 숙적 오나라를 멸망시켜 부귀영화와 권력이 확실하게 보장됐지만 이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떠났다. 그리고 문종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 속에 들어있던 충고가 '날던 새를 다 잡았으니 좋은 활은 치우고, 교활한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는 그 유명한 '조진궁장(鳥盡弓藏) 토사구팽(兎死拘烹)'이다. 범려는 자신의 힘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비울 수 있었던 군자였다. 달콤했던 그 자리에 연연했다면 그 역시 문종처럼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혁명'같은 7·30 재보선이 끝났다. 손학규 후보는 새파란 정치 신인에게 고배를 마시고 "패자는 떠나는게 순리"라는 말을 남기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던 임태희, 한때 대권주자로 거명됐던 김두관, 그리고 노회찬도 낙선했다. 선거 결과를 보면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연(聯)으로 귀거래사 만큼 사랑을 받는 이형기의 시 '낙화'가 떠오르는 오늘이다. 이제 그들도 '남아야 할지 떠나야 할지' 힘든 선택을 해야한다. 정치란 늘 결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