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규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장
가정에선 자식이 잘 되라고
학교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때리는것 부터가 일상적 폭력
이러한 악습을 보호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주는것 부터
폭력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것


윤일병 사건의 원인에는 일상화된 폭력이 들어 있다. 흔히 폭력범죄가 만연하는 이유를 영화나 게임 등에서의 무분별한 폭력 장면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보여주기' 위한 특이성에 가까운 폭력이지 일상적인 폭력은 아니다. 일상화된 폭력은 너무나 사소하고 시시해서 감상의 소재가 되지 못한다. 귀를 잡아당기고 발길질을 하고 골탕을 먹이는 장면을 영화로 만들면 누가 보겠는가.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런 것들이 쌓여 분노와 원한을 만들어 낸다. 이런 괴롭힘은 조직적이거나 계획적이지도 않으며 폭력으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생활화돼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고 당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분노와 억울함을 유발하는 폭력이 있다. 오랫동안 감정의 앙금으로 남는 폭력이 있다. 강자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위해를 가할 때다. 실제 폭력 영화에서의 폭력은 쾌감을 만들어낸다. 액션 또는 무협 영화에서의 폭력은 윤리적인 안정감 속에서 즐긴다. 정의가 늘 승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인격적 모멸감이나 인간적인 역겨움이 없다. 누군가는 이런 폭력마저 없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런 세상은 없다. 테러나 전쟁에서의 폭력도 일상을 넘어선 특이성에 가까운 폭력이다. 특이성으로 전환된 폭력은 메시지나 상징적인 도구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일상적인 폭력은 그 목적이 타인에 대한 위해 그 자체로 집중된다.

총기 난사처럼 '사회적 사건'으로 규정되는 폭력은 피해와 가해의 성격이 섞인 일상을 넘어선 폭력이다. 사연이 있고 파고들면 들수록 누가 옳은가 혼란이 올 정도다. 실제로 사회가 우려하는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격히 구분되는 일방적인 폭력이다. 괴롭힘이나 왕따 등은 사회적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타인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위해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이 잘 되라고 때리는 것, 학교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때리는 것부터가 일상적 폭력이다. 우리는 이런 폭력은 폭력이라고 하지 않고 그럴듯한 명분을 달아서 옹호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상적 악습을 보호하고 명분을 주는 데서부터 폭력은 시작된다. 윤일병사건의 잔인함에는 사소하다고 생각해 온 일상적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군대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정도만 달랐지 누구나 그러려니 생각했던 작고 작은 일상적 폭력의 합이 이 사건의 잔인성을 구성하고 있다.

옛날이지만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늦게 낸다고 맞았고, 지각했다고 맞았고, 수학시험 성적이 떨어졌다고 맞았고, 선생님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고 맞았다. 이것이 일상적인 폭력이다. 무슨 대단한 폭력을 경험한 일이 없음에도 이런 것들이 쌓여 그 시절을 폭력과 억압으로 기억한다. 군대에서는 줄을 잘못 섰다고 맞았고, 늦게 도착했다고 맞았고, 문을 세게 닫았다고 맞았다. 대단한 군기위반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선임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으며 자신이 선임자가 되면 또 그렇게 했다. 폭력이 황야의 결투처럼 장렬했더라면 그것이 추억거리는 될지언정 그 어떤 분노나 억울함의 찌꺼기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일병사건을 들여다보면 사소한 폭력으로 간주돼 온 것들이 여과장치없이 걸러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축적돼온 탓이 컸다. 주범인 이병장 앞에서는 피해자였던 몇몇 선임자들이 가해자로 돌변한 데는 폭력의 일상성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은 일상화되면 조금씩 익숙해진다. 이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하는데 감수성이 예민할 때는 몽둥이로 맞는 것보다 말 그대로 꽃으로 맞는 게 더 모욕적이다. 이 사소함을 우리 사회는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른들이나 교사가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아이들도 그것을 알 까닭이 없다.

맞을 짓을 했다, 왕따 당할 짓을 했다는 말처럼 폭력의 일상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없다. 일상화된 이러한 습성을 방치한다면 폭력은 군대로 전이되고 교도소라든지 폐쇄된 기관할 것 없이 걷잡을 수 없이 전염된다. 학교나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폭력을 없애나가는 일이야말로 폭력예방의 지름길일 것이다.

/박연규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