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예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 한토막. 농부가 밭에서 요술램프를 발견했다. 램프를 문지르자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농부가 말했다. "이웃집에 젖소 한마리가 생겼는데 가족이 다 먹고도 남을 만큼 우유를 얻었고 결국 큰 부자가 됐어." 그러자 요정이 말했다. "그럼 이웃처럼 젖 잘나오는 젖소 한마리 구해 드릴까요? 아니면 두마리?" 농부가 대답했다. "아니, 이웃집 소 좀 죽여줬으면 좋겠어."

웃자고 한 얘기인데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괜히 콕 찔린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저 농부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다. 세월호 특별법을 합의하면서 끝까지 당리당략에 주판알만 튕기는 여·야 수뇌부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해서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보고, 심지어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고, 시기와 질투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사람이 주변에 의외로 너무 많다. 말이 질투, 시기지 따지고 보면 모두 불신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러시아의 농부가 이웃집 주인이랑 신의와 의리로 맺어진 돈독한 사이였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둘의 사이는 불신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사이였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렇다. 지독한 불신사회다.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 몸에 칭칭감고도 남는 삼손이 와도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는 불신의 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대와 세대 사이에, 아니 여기 저기에 수없이 솟아나 있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다. 지금같은 망국적인 불신의 벽은 태어나서 보다보다 처음이다. 이러다 '불신병'이 치유가 어려운 한국의 고질병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겁이 난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이 됐을까. 멀리 갈 것도 없다. 정치권을 보면 해답이 나온다. 우리사회에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크다. 정치의 힘이 세다보니 사사건건 정치에 휘둘리게 된다. 아직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해서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비공식적이지만, 한국 정치인들의 '정치쟁점화' 능력은 전 세계 1위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정쟁화 시키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치권이 마음만 먹으면 이쑤시개 하나도 정쟁화 시킬 수 있는 게 한국 정치인이다. 물론 혼자의 힘으로 될순 없다. 여기에 여당이건 야당이건 우호적인 언론과 종편채널의 도움을 받고, SNS를 가미하면 딱 떨어지는 정쟁화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대한민국 모든 불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른데도 '어'라고 말해놓고 '아'였다고 우기는 게 우리의 정치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면서,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국민에게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말하는 게 한국정치다. 이런 허세는 여전히 그들이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고 착각하고 있는데서 비롯된다. 한때 국회의원이었던 내가 아는 지인은 "금배지를 달면 세상이 100배는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죽어도 이 배지를 빼앗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다 덧없지만, 금배지가 그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국회의원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눈곱만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결국 그 마약같은 '달콤한 유혹'을 떨치지 못해 거짓말을 하게 되고, 없는 말을 만들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게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정치로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돈을 받고 '입법로비'하고, 출판기념회를 열어 돈을 거둬들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숨막히는 4박5일의 일정을 끝내고 돌아갔다. 교황이 떨어뜨려 놓고 간 말 중 10%만 주워 담아도 우리 사회의 불신병은 치유될 것이다. 물론 국민보다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교황이 떠나던 날 TV에 나와 누가 한 말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린다. "지금 아무도 안 믿어요. 정치인도 안 믿고, 정부도 안 믿고, 언론도 안 믿고, 국과수도 안 믿고, 검찰·경찰도 안 믿어요." 거기까지는 좋았다. 마지막 한마디 "그런데 교황은 믿어요." 불행하게도 교황은 이제 이곳에 없다. 지지든 볶든 이제 남아 있는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 그나마 교황이 머물던 100시간동안 잠잠했던 불신의 불꽃은, 이제 또다시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게 지금 두려운 것이다. 교황님 돌아와 줘요. 우릴 여기에 팽개쳐 두고 혼자 떠나시면 어떡해요.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