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교수
멀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걱정해 본다
슬기로운 사람들이
이 난경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해주기를 기원해 본다


중국 내몽골 쪽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은 초원지대다. 버스로 네 시간을 달려도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소떼들, 양떼들, 말무리들이 아무 걱정없이 초원의 풀을 뜯고 있다. 어떻게 넘어갔는지 국경 표지가 되어 있는 철망을 넘어 소떼가 풀을 뜯는다. 얼마 안 가서 내몽골 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몽골인들은 게르를 짓고 철따라 움직여가면서 산다. 양가죽으로 둘러친 집을 끌고 다니며 긴 겨울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초원에서 눈과 함께 산다. 도로는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초원 사이로 한 가닥 실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도로에는 휴게소라 할 만한 것도 없다. 때가 되면 길가에 차 세워두고 볼일 보고 또 갈 뿐이다.

구름은 이 초원의 지배자 가운데 하나다. 세상의 절반은 초원, 절반은 하늘이다. 이 하늘에 변화무쌍, 모였다 흩어지기를 하며 지금 금방 먹잇감을 만나 아가리를 벌린 백호 형상을 지었다. 성난 호랑이 입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빨 빠진 노호의 얼굴로 변해간다. 어느 틈에 호랑이는 집어 삼키려던 먹잇감과 형체가 합쳐져서는 흰무리 버섯구름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곳은 흰 구름이요, 저쪽에서는 먹구름이다. 먹구름 낮게 드리운 곳에 그 아래로 잿빛 운무가 초원아래까지 뻗어 있다. 그곳은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번개가 번쩍한다. 하지만 금방이다. 길어야 삼십 분을 넘기지 못하고 비는 그친다. 하지만 비가 멈추는 게 아니라 구름을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름이 이쪽으로 쏠리면 나도 비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위도 높은 초원의 가을비라 해서 만만히 보면 안된다. 파초잎 같은 빗방울이 철썩철썩 얼굴을 때릴 수 있다.

다행히 오늘은 비를 피했다. 10월이면 벌써 눈이 내린다는 이곳은 지금 야생화가 늦가을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아주 옛날 지리산 잔돌평전에 가서 만났던 산국같은 보라색 가을꽃이 지금 피어나 있다. 보랏빛 조롱꽃도 숨은 듯 나와 피고, 자주색 엉겅퀴도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에 피었다. 내몽골 백화나뭇잎들이 햇살에 반짝거린다. 쓸쓸한 듯 호젓한 듯 아름다운 날이다.

하루 지나고 어느덧 그 드넓은 초원지대도 벗어났다. 버스는 긴 강을 타고 깊은 삼림지대를 파고들어간다. 굽이 굽이 포장 안된 길로 접어든 버스는 강이 계곡 따라 흐르는 사이에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순록을 키우며 산다는 부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부족은 에웬커라고 불리고, 시베리아 쪽에서 400년 전에 이곳 삼림으로 남하해 왔다고 한다. 인디언 족 텐트 같은 곳에 살면서 순록의 젖을 짜넣은 빵을 만들어먹고, 숲속에 사는 나뭇잎으로 차를 우려 먹는다. 순록의 가죽으로 해 입은 옷으로 겨울을 나고, 삼림 속에서 뭍짐승을 잡고 강가에 나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다. 순록 가죽에 장식을 그리고 새겨 걸고, 순록 가죽을 대서 애기를 재우는 요람을 만든다.

그네들의 숲속으로 들어가니 피톤치드 향이 숲속에 그득하다. 암에 걸린 어떤 사람은 숲속에 들어가서 살아났다고 했다. 숨을 들이마신다. 숲속 향기를 숨구멍 깊숙이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이 숲은 멀리 하얼빈까지 끊김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이들은 저 먼 시베리아에서 숲을 타고 이곳까지 내려와 지금 이곳에서 몇백년째 살고 있다. 지금 그들의 국적은 중국인. 그러나 그들은 에웬커족이다. 나라 소속이야 어디라 해도.

이곳에서 한국은 멀다. 비록 금방 돌아가겠지만 지금은 먼 곳의 사람이다. 세상은 이제 국경선으로 남김없이 둘러쳐지고 세상 어느 곳 하나, 남극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 땅이 아닌 곳 없이 되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 인공적 세계의 일원임을 굳게 믿는 한에서다. 땅, 자연은 나라보다 먼저 있었고 나중까지 있을 것이다.

한국이 먼 만큼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멀어 보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해탈은 과연 가능할까. 멀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염려해 본다. 슬기로운 사람들이 이 난경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해주기를 기원해 본다.

한국은 지금 초가을의 빛나는 햇살이 곡식을 알차게 '영글리고' 있겠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