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한 초등학생이 부부싸움으로 불길에 휩싸인 집안에서 어린 여동생을 품에 안고 아파트 3층 아래로 뛰어내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집안을 뒤덮은 화염으로 어머니와 할머니가 숨지고 홧김에 불을 질렀던 아버지도 3도 화상을 입어 중태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남매는 이같은 사실을 모른채 이틀째 병실에 누워 부모를 찾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인 허모(13)군의 집에서 불이 난 것은 지난 4일 오전 4시께. 평소 불화가 잦던 부모는 이날 두 남매가 잠들어 있는 사이 격한 부부싸움을 벌였고 싸움끝에 화가 치민 허군의 아버지(41)는 집안에 있던 시너를 거실에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삽시간에 집안 전체로 옮겨붙으면서 당황한 아버지가 화상을 입은채 밖으로 뛰쳐 나간뒤, 동생과 함께 잠을 자던 허군은 방안으로 새어들어오는 연기에 깨어났지만 이미 거실쪽은 시퍼런 불길이 치솟고 있어 탈출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엄마 아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죽는다'는 데 생각이 미친 허군은 겁에 질려 울고 있던 여동생을 끌어안고 의자를 통해 창문밖으로 무작정 몸을 날렸고 떨어진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뒤 119구급차를 통해 아주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검사결과 허군은 얼굴과 몸 등에 약간의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은 것외에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오빠 품에 안겨 떨어졌던 여동생도 팔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안에 있던 어머니 박모(39)씨와 건넌방에서 잠을 자던 할머니(75)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채 연기에 질식해 숨졌으며 불을 지른뒤 뛰쳐나갔던 아버지는 승용차를 몰고 서해안고속도로 비봉IC 부근까지 달아났다 검문중이던 경찰에 붙잡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중태다.

허군은 “불길속에서 동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끌어안고 뛰어내렸는데 동생이 더 많이 다쳐 미안해요”라고 동생부터 챙겨 주위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어린이날인 5일,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의 손을 잡고 놀러가지도 못하고 엄마와 할머니가 이미 숨진 사실도 모른채 아주대 병원에 누워있던 허군은 “빨리 나아서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계속 엄마 아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