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과 가까운 강화·교동行
고위직 한해 '정책적 예외'
조선시대 형벌 중 유형(流刑)은 중죄를 범한 자를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특히 조선시대엔 정치의 주도권을 둘러싼 당쟁이 낳은 정치범들 중 사형을 면한 정치범들이 유형으로 처벌됐다.
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난 16일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왕과 왕실 가족의 유배지 인천의 섬'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조선의 도읍 한양과 가까웠던 강화, 교동 등 인천의 섬은 왕족이나 왕실 가족의 유배지 역할을 했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김종서를 척살하고 안평대군을 붙잡아 강화에 안치(安置)했다. 안치는 하급 관리나 서민은 해당되지 않고 왕족이나 고위관리 등에게만 적용한 유배형이며, 유배지에서도 거주지를 강제로 제한했기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도 했다. 안평대군은 이후 교동현으로 옮겨졌다.
남 소장은 "안평대군을 거제도, 진도 등 거리가 먼 곳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국왕이었다가 폐군이 되었거나 국왕의 혈육으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에 한해서는 정책적으로 예외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며 "즉, 이들의 동태를 쉽사리 파악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은 사대부나 일반 관료와는 신분이 다른 인물들이기에 예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연산군은 1506년 9월 2일 반정에 의해 폐위돼 교동으로 유배됐다. 연산군을 교동으로 옮길 때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만이 따라갔고, 당상관 1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했다. 연산군은 그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다 31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과 폐비는 강화에 안치됐다가 교동으로 옮겨졌다. 광해군이 교동으로 간 시기는 병자호란으로 강화가 위험에 처했을 때였는데, 광해군이 청에 의해 복위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결국 병자호란 뒤 제주도로 옮겨진다.
이 밖에 1613년 영창대군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강화에 안치됐고, 1651년 인조의 다섯째 아들 승선군도 역모사건에 연좌돼 강화도에 안치됐다. 사도세자의 손자인 상계군은 1779년(정조3년) 당시 권력자인 홍국영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됐다.
다음 3강은 9월 30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강봉룡 목포대 교수가 나와 '해양인식의 확대와 해양사'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