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혈연의 핵심은 바로 '성(姓)'이다.
'김·이·박'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성은 가족을 연결하고 본인의 정체성을 확인케 하는 매개물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성씨 문화는 분명히 가부장적 봉건적 유훈물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속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 성을 파괴하는 바람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지금껏 우리 사회는 아버지의 성만을 이름앞에 쓰도록 전통과 법의 틀로 옭아맸다. 그 누구도 이런 사회 규범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런 뿌리깊은 가부장적 질서에 성평등을 요구하는 여성단체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 운동은 양부모 성을 동시에 써서 억압받는 성을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바람에 힘입어 아이들에게 양성을 써서 이름을 지어 주는 부모들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부부간에 사랑을 확인하고 아이에 대한 책임감의 징표를 위해서라는 게 그들의 이유다. 이 부모 양성쓰기는 여성 인권의 신장과 함께 계속적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여성단체들은 이런 단계를 넘어 평등한 성구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예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천지역 모여성단체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최박미란(32)씨. 그녀의 원래 호적상 이름은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아 최미란이었지만 지난 98년부터 이름을 바꿔 버렸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는 그는 가부장제 이름표를 과감하게 털어버린 것이다. 아예 부모의 성을 동시에 써서 호적을 바꿔 버릴 생각도 했지만 아버지의 성만 쓰도록 규정하고 있는 현행 법의 현실앞에서 좌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양성으로 바꿔 버린 뒤 오히려 활동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명함을 주고 받을때 양성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 의아한 눈길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름을 바꾼 배경과 호주제 폐지의 정당성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등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벌이고 있는 호주제 폐지 운동의 홍보에 훨씬 효과적임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청탁 원고를 주면 오타인 줄 알고 출판사 관계자들이 몇번씩 확인하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대학 3년생인 정김세희(21)씨도 지난해부터 이름을 바꿨다.
여성인권에 관심을 가져온 정김씨 역시 원래 이름 김세희에서 정김세희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조금 독특한 것은 부모의 성을 같이 사용한 것이 아니다. 원래 이름 김세희의 앞에 붙은 '정'은 아무런 연고없이 어감이 좋아 사용했을 뿐이다. 자신의 성에 구속받지 않으려는 신세대다운 의식의 단면이 엿보인다.
또 이모(32)씨와 정모(28)씨 부부도 지난해 태어난 딸아이에게 양성을 써서 입적시켰다. 결혼하면서 부부가 이렇게 하기로 서로 약속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망설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고 아이에 대한 무한 책임을 다짐하자는 의미에서 부모의 성을 동시에 썼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성인권 신장을 목표로 하는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것이 주류로 자리잡은 한편 그 움직임은 보통 사람, 특히 20·30대 젊은 남성들에게로 퍼지고 있다.
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하고 있는 배임○○(35)씨. 민주적인 가정을 만들자는 다짐에서 2년 전부터 부모의 성을 함께 쓰고 있다.
벤처기업과 광고·홍보계열 회사에서 일하는 남성들도 명함에 4자 이름을 적어 자신의 성향을 은연중 드러내는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처음에는 회원들이 가부장제의 모순을 드러내고 호주제 폐지를 위해 부모 성을 같이 쓰자는 운동을 벌였지만 최근에는 이에 공감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부모 성을 함께 쓰는 사람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 "남아선호 고정관념 깰 대안"
여성단체들이 가부장적 질서의 대표적 코드인 부계 성(姓)을 거부하고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에 나선 것은 지난 1997년 3월 9일부터다.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13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이이효재씨와 고은광순씨 등 국내 여성단체 대표 170여명의 인사들이 '부모성 함께 쓰기'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이들은 “여아낙태라는 심각한 인간 생태계 파괴가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남아선호의 고정관념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성씨 제도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진보진영의 여성계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을 결성하고 법개정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호주제가 엄존하고 있는 만큼 부모 성을 함께 써 필명 또는 예명을 사용하거나 명함을 만들어 쓰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또 아버지나 어머니의 성중 어느 것이 앞으로 오든 상관없이 부모성을 쓰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성을 쓰지
비틀린 혈연문화에 '이유있는 반기' 姓평등 그날까지…
입력 2002-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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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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