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교에 가면 매화 내음이 난다.

취할 듯 강렬한 라일락이 아니고 아찔하게 유혹하는 백합이 아니어서, 그래서 도도함에 지레 주눅들 염려없는 잔잔한 미소가 있다.

언뜻 향수가 느껴진다. 오래된 정원을 거닐다 스스르 눈감게 하는 봄날 오후의 여유 같은 것일까, 고목에 가려진 창문 틈에서 새어나오는 계집아이들의 재잘거림도 그리 낯설지가 않다. 왜일까?

나혜석, 암울한 시대를 깨어있는 삶으로 살았던 바로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꿈을 보듬던 학교. 삼일소학당, 삼일여학교, 수원여자 매향학교를 거쳐 이제 매향여중·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로 불리는 그 학교가 3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어, 100주년?

언젠가 와본 듯한 낯익음, 원인모를 포근함의 실체가 느껴지는 듯하다. 100년이라니, 화성 200년의 절반에 해당하는 세월을? 악, 악 소리 몰고 다니는 그 흔한 연예인 하나 배출하지 못한 학교. 몇십, 몇백명씩 명문대 진학시켰다고 요란을 떠드는 학교들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먼 실업계 학교. 하지만 수원에는 '매향학교'가 있다. 비바람 속에 수없이 피고지기 100년, 가던길 멈춰 서게하는 매화의 은은한 향기처럼….

세계최강의 프랑스 예술축구가 월드컵에 첫 출전한 아프리카의 '촌나라' 세네갈에 격침된 다음날. 온 세계가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이고 곳곳에서 화려한 문화축제가 이어진 6월1일 오후, 경기도문화예술회관에서는 매향 여학생들의 조촐하지만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개교 100주년 기념 예술제. 선거판을 뛰는 정치꾼들이 사람들 많이 모인 만석공원과 연무대를 기웃거리는 사이 '그들만의 축제'로 조용히 치러진 이 예술제는 여중생들의 피아노연주에서 머리 희끗한 엄마뻘, 할머니뻘 동문들의 합창과 무용에 이르기까지 시종 뜨겁기만 했다.

후배요 제자인 손녀뻘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초로의 동문 유수자 교장도, 30년 연하의 '후배' 백진영 교사도 시종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100살 생일잔치에 축하객이 빠질 수 없는 법. 이날 오후 2시에는 늦봄의 푸르름 짙은 방화수류정에서 지역내 100여개 초·중·고교생들이 초청돼 사생대회가 열렸다. 수원시 팔달구 매탄동 효원공원에서는 비슷한 수의 학생들이 모여 문예백일장을 치렀다. 두 행사 모두 개교 100주년을 맞은 학교의 주최에 걸맞게 수원교육장배.

학교측은 생일날인 3일 학교 강당과 교정에서 뜻깊은 기념식을 갖는다. 교훈탑 제막식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인들의 휘호에 자주 등장해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100년 역사를 떠올리면 뜻마저 새로운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이 학교의 오랜 교훈이다.

어지간한 인문계 학교가 명함도 못 내밀 실업계의 강자답게 오후 2시에는 인터넷 정보대회가 준비돼 있다. 이틀간 8개 교실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수원 200년, 매향 100년을 한눈에 지켜볼 수 있는 구경거리이고 동문 교역자와 퇴직 교직원 초청모임 역시 다른 학교가 흉내낼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행사도 월드컵을 축하하는 문화행사에 일조한다면 나름대로 뜻깊겠지요.” 각종 월드컵 행사에 가려 빛이 바랠 것이 못내 아쉬울 듯도 한데 오래전부터 행사를 준비해온 유 교장등 이 학교 동문 교사들은 놀랄 만큼 담담하고 밝은 표정이다. 이 역시 전통이고 연륜일까.

매향학원은 한말 개화기인 1902년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회의 선교사 M F Scranton 여사에 의해 당시 수원부 보시동 수원읍교회(현 종로감리교회)에서 여학생 3명으로(삼일 소학당) 문을 열였다. 1909년 4년제 삼일여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은뒤 이듬해 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중 1명이 수원의 여성 나혜석이다. 1917년 삼일여학교의 학감이 된 김세환 선생은 3·1운동 48인의 한사람으로 참가했다 일제의 모진 박해 속에서 해방직후에 숨을 거뒀다. 1938년 매향여자심상소학교로 교명이 변경된 뒤 해방직후인 1946년 매향여자초급중학교로 바뀌고 51년 매향여중, 58년 매향여자가정고등학교 등을 거쳐 2000년 3월에는 현재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매향학원이 배출한 공식 졸업생만 2만9천여명, 초창기 시절과 현 재학생을 합치면 매향 가족은 모두 4만여명에 육박한다.

후배 교사들로부터 나혜석 이후 최고 출세(?)했다는 놀림을 받는 유수자 교장(중학 14회, 고등 4회). 유 교장으로부터 수업을 받은 김선화 교사(중학 23회, 고등 13회), 다시 김 교사에게 배운 김화순, 임혜정 교사(중 32회, 고 22회)와 막내 백진영 교사(중 45회, 고 35회) 등 선-후배, 은사-제자로 엮인 4대가 함께 교무실을 쓰는 흔하지 않은 학교. 수원에는 매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