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이 갖고 있는 책이 수만 권에 이르며 누추한 거리에도 책을 파는 곳이 두셋씩 마주보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자녀는 함께 거처하면서 스승을 좇아 경서를 익히며 조금 더 커서는 벗을 골라 공부를 한다. 아래로는 평민의 어린 아이들까지도 선생을 찾아가 배운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이 쓴 기행문 '고려도경(高麗圖經)'의 한 대목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책읽기는 중국에서도 소문이 자자했었다. 정조는 '보지않는 서적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책을 좋아한 호학(好學)의 군주였다. 세손시절 베이징에서 책을 직접 수입해다가 읽었고, 즉위하자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 청나라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1만여권중 5천여권을 사오게 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서점은 일곱 곳이 있다. 서점 한 곳의 책은 대충 헤아려보아도 수만권을 넘는다. 얼굴을 들고 한참 보고 있노라면, 책의 제목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어질어질해진다' 홍대용은 1765년 베이징 책거리 '유리창(琉璃窓)'에서 받은 충격을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에 이렇게 적었다. 유리창 방문은 당대 조선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던 꿈이었다. 18세기 일본에만도 300여개의 서점이 있었지만, 조선에는 단 한 곳의 서점도 없었으니 오죽했으랴.

1866년 병인양요때 강화도에 침략해 외규장각 도서를 강탈해 간 프랑스 군인은 귀국보고서에 '조선인의 집을 뒤지다보니 가난해 보이는데도 집집마다 서고가 있고 책이 가득 차 있어 자존심이 상했다'고 적었다. 우리 조상의 책사랑이 이런데, 우리나라 성인 독서량은 연평균 9.2권으로 193개 유엔회원국 중 겨우 161위다. 지난해 가구당 월 도서구입비는 고작 1만8천690원이다. 지독히도 책을 읽지않는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부터 도서정가제가 실시됐다. 벌써 자유로운 가격경쟁을 방해하고, 책값만 높아져 '제2의 단통법(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도 책을 읽지 않는데 도서정가제를 핑계로 도서 구입이 위축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유난히 공짜와 세일을 좋아하는데 할인 혜택까지 각박하다면 누가 책을 사 볼 것인가. 무료 배송, 제휴카드 할인으로 무장한 온라인 서점만 배를 불리지않을까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