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대중문화 인기 기반
동아시아 중견국 리더십 외교
펼칠 수만 있다면
대미·대중 양자 관계의 불안한
눈치보기식 줄타기 외교 대신
주도적 역량발휘 기회 얻을 수도


얼마 전 한국 외교사에 남을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10월에 있었던 전시작전권 환수 시기의 2020년 이후 연기고, 또 다른 하나는 11월에 있었던 한중 FTA 타결이다.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는 한국전쟁 직후 38년이 지난 노태우 정부 때가 돼서야 시작돼 1994년 12월 김영삼 정부 때 평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됐다. 그 후 또 20년 가까이 지난 2012년에서야 전시작전권 환수를 하기로 합의했지만 지난 10월 2020년 이후로 사실상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한편, 한중 FTA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자유무역 규모가 확대됐다. 논란이 됐던 쌀, 배추, 돼지고기 수입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우리나라는 미국, 유럽연합, 중국 등 세계 3대 경제권과 모두 FTA를 체결한 국가가 됐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강대국과의 줄타기 외교 활동을 통해 안보와 경제 문제를 해결해 왔다. 우리는 세계 경제 순위 10위 안에 든다고 자부하지만 미국·중국과의 외교 관계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역사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오늘날 여러 동아시아 국가들은 강대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패권적 영토확장 과정에서 줄타기 외교를 통해 살아남았다. 1970년대 초 고도성장의 기적을 이룩한 동아시아의 네 신흥공업국들(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성공 원인을 상명하복식 권위주의적 유교적 전통 즉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에서 찾은 적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의 성장은 냉전시대 강대국들과 우호관계를 기반으로 한 경제지원에 근거하고 있다. 경제발전의 수준, 정치체제, 종교, 언어, 역사적 경험 등이 천차만별인 아시아 국가들은 패권주의에 희생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타국과의 연합을 부담스러워 하지만 강대국과의 줄타기 외교에 지친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협력과 연합을 위해 누군가 나서서 강대국들에 동아시아 국가 연합체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해주기 바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존경받는 중견국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동아시아 대중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국은 이를 기반으로 외교적으로 남북관계 개선, 올바른 역사인식을 토대로 한 한·중, 한·일 간 협력과 더불어 외교안보 분야에서 국민행복 시대를 공고히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사회 곳곳에 퍼지고 있는 우리 음악, 문화 관련 한류 붐에 이어 지구촌 균형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해 앞장서는 책임있는 미들 파워(Middle Power) 국가 이미지의 신(新)한류 역량을 구비해야 한다.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공공외교에 접근해 왔다. 일본·중국 등 주변국들보다 국내총생산(GDP)에 비해 더 많은 돈을 문화산업에 투자해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의 개선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외교 전략으로 연결돼 구체적인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데 잘 활용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특히 한미, 한중, 한일 외교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한류라는 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과 한중 경제협력은 줄타기 외교의 핵심이다. 한미 동맹의 강화는 한중 간 경제통상 관계를 대등한 입장에서 추진할 수 있게 해주고 한중 간 전략적 경제협력 관계는 우리가 더욱 대등한 입장에서 한미 동맹 관계를 성숙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에 한국이 대중문화의 인기를 기반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중견국 리더십 외교를 할 수 있다면 한국은 대미, 대중 양자 외교관계의 불안한 눈치보기식 줄타기 외교 대신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수준의 외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와 한중 FTA 같은 강대국과의 외교적 협상과정이 줄타기 외교의 결과라고 한탄하기보다는,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한-호주, 한-뉴질랜드 FTA가 다양한 다자체제에서 여러 동아시아 참여국들과 한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외교역량 발휘의 기회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홍문기 한세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