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로 폐허된 휴양지 헤이스팅스 항구 주민 기금모아 사들여 개발
천연 자원 풍부한 라임레지스 지역민 관광상품 만들어 외지인 유치
공동체 재건돕는 로컬리티 성공사례… 공동 이윤·일자리 창출 효과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 낡은 마을에 생기를 불어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을을 헐어버리고 재개발을 하거나 외지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는 위락시설을 유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구상일 것이다.

하지만 마을을 살리고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해답은 주민 스스로 갖고 있다. 지역 공동체가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발굴하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할 때 마을의 재생이 시작된다.

영국 북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헐(Hull)은 한 때 거리에 매일 1천여 개의 마약 주사바늘이 나뒹굴 정도로 쇠락한 도시였다.

1900년대 고래잡이가 성행했지만 1930년 경제대공황과 이후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매춘과 마약, 범죄가 들끓었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주민들은 어떻게 하면 마을을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1994년 몇몇 주민이 버려진 건물과 망한 상점을 싼 값에 인수해 청소년과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후 슬럼화된 골목의 건물과 공공시설을 차례로 인수해 보육·의료기관을 세우고 주민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같은 활동은 자연스럽게 고용창출로 이어져 지역의 실업 해소에도 크게 이바지 하게 됐다. 헐 주민들이 펼친 이 프로젝트 이름은 '굿 윈(Good win)'. 영국의 지역 공동체 살리기 네트워크 기관인 '로컬리티'(Locality)가 성공시킨 대표적인 사업 중 하나다.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를 위해 지역 공동체가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정부의 파트너가 된 것이다.

1970년대부터 영국의 마을만들기, 지역재생 사업을 해온 각 지역별 DT(Development Trust·개발신탁)는 그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1993년 전국협의회(DTA·Development Trust Association)로 확대됐다. DTA는 공동체 기업 설립과 마을 공동체가 땅과 건물을 소유하는 것을 돕는 단체다.

DTA는 이후 비슷한 성격의 다른 기관과 합쳐 2011년 4월 로컬리티로 이름을 변경했다. 로컬리티란 쉽게 말하면 각 마을공동체의 네트워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로컬리티는 쇠락해 가는 마을을 주민들의 힘으로 되살리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주민들이 기금을 마련해 빈 건물을 사들여 공동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직접 관광상품을 발굴해 마을의 소득을 창출하는 것이다. 현재 로컬리티에는 750개의 회원단체가 있고, 자산 가치만 해도 8억5천만 파운드(1천484억원)에 달한다.

영국 헐과 더불어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영국 남해안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 중 하나였던 '헤이스팅스 항구(Hastings pier)'다. 1990년대 태풍 피해를 입으면서 항구는 황폐해졌고, 결국 2002년 문을 닫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10년 화재가 발생해 시설물의 95%가 불에 타 사라졌다.

주민들의 자부심이었던 항구는 점차 청소년들의 비행장소로 활용되기도 하고, 범죄가 발생하면서 부끄러운 존재가 돼버렸다. 이곳 주민들은 헤이스팅스를 화려한 축제와 볼거리가 있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항구를 소유하고 있는 개발업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다.

주민들은 항구를 마을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지역 의회와 함께 법적소송을 진행해 항구를 개발업자들로부터 강제로 사들이는데 성공했다. 항구 매입에 필요한 비용 1천100만 파운드(192억원) 중 50만 파운드(8억7천만원)는 주민들이 직접 돈을 모아 마련했고, 나머지는 복권기금에서 지원받았다.

2013년 8월 헤이스팅스 항구는 주민의 것이 됐다. 2016년 헤이스팅스 항구가 재개발되면 매년 32만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영국 남부의 라임 레지스(Lyme Regis)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사례다. 화석이 많이 발굴되는 라임 레지스는 '주라기 해안'으로 유명하다. 관광자원은 풍부하지만 정부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자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화석에 관련된 자연사 박물관을 세우고 지리학과 고생물학 정보를 담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전문가들과 함께 '주라기 해안'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마을 주민들이 주도하는 축제도 매년 개최해, 지역 소득 증대에 큰 보탬이 됐고, 더불어 일자리도 늘어났다.

이처럼 지역 주민들이 직접 마을을 되살릴 수 있었던 데는 로컬리티의 '공동체 오거나이저(Community Organiser)'의 도움이 컸다. 로컬리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크게 3가지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능력을 개발해주고 ▲중요한 지역사회 이슈를 찾아 움직이도록 돕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매년 500명의 공동체 오거나이저를 양성해 각 지역으로 파견한다.

로컬리티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게 우선이다. 또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마을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다는 명확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공동체 오거나이저들은 주민들을 만나 "무엇을 변화하고 싶은지"를 먼저 묻는다.

로컬리티 개발담당관 크리스털 주어링 씨는 "복지서비스 같은 경우는 규모가 커질수록 세세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 문제가 커지고 많은 비용을 쓰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각 공동체마다 원하는 욕구가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는 마을을 만들어가는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로컬리티가 추구하는 가치는 '큰 사회, 작은 정부(Big society not big government)'다. 정부가 직접 관여해서 마을 재생사업을 벌이기 보다는 마을공동체별로 각자에 맞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힘의 무게가 지역사회 가장 낮은 사람에게 주어졌다.

영국은 2011년 국회에서 '지역주권법 시행령(Localism act)'이 통과되면서 지방정부와 지역사회에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 시행령은 주민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만약 주민들이 마을의 오래된 가게나 축구장을 지키고 싶으면 이 시행령을 활용하면 된다.

주민들에게는 4가지 권리가 주어진다. 지역의 의미있는 건물이 매물로 나오면 판매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공동체에서 건물을 사들여 공동으로 운영할 수 있다(Comunity right to bid).

또 마을 공동체가 새 상점이나 주거 시설들을 만들고 싶다면 복잡한 건축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Comunity right to build).

지역 주민들은 주도적으로 마을의 개발 계획에 참여하고, 결정할 기회도 갖는다(Neighbourhood plannig).

지역 주민 스스로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지역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Comunity right to challenge).

로컬리티는 이같은 지역주권법 시행령을 바탕으로 더 탄탄하게 영국 사회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주민들은 낡은 건물을 사들여 공공 복지시설로 활용하기도 하고, 공동으로 매입한 땅에서 채소나 과일을 길러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청소년과 노인 복지를 위한 사업도 주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영국 버윅(Berwick) 지역 주민들이 공동으로 투자한 풍력발전 사업은 지난 20년간 250만 파운드(43억6천만원)의 이윤을 내기도 했다. 주민들은 풍력발전 사업으로 마을의 환경을 지키면서 일자리도 창출하는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크리스털 주어링 씨는 "주민들과 공동체 오거나이저들은 테이블에서 머리만 굴리는게 아니라 발로 직접 뛰면서 현장을 보고 사업을 제안하거나 정부지원 사업에 응모한다"며 "각 지역의 로컬리티 단체들이 정부의 큰 사업을 감당할 능력이 안될 경우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는 작은 사업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