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부가 지나친 정치개입은 정치권 잘못도 커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떠넘겼기 때문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눈에 띄게 중요해지고 있다. 권위주의 시절 행정부의 힘에 눌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헌재가 민주화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 행정부와 입법부의 결정에 반하는 판결을 종종 내놓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정치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표적 예로 2004년 5월 노무현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기각 결정과 동년 10월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위헌결정이 있다. 보다 최근으로는 2014년 10월 선거구제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과 12월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이 있었다.
이러한 헌재의 영향력과 독립성 증대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민주주의의 원칙중 하나인 3권 분립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며, 나가 입헌주의 원칙 아래에서 헌법의 절대성을 수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재의 지나친 영향력과 그에 따른 소위 '사법민주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 또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법을 대표하는 입헌주의와 정치를 대표하는 민주주의와의 잠재적 갈등은 분명히 존재한다.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선출되지 않고 정치적 책임도 직접 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에게 막강한 정치적 권한을 부여함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을 비롯해 미국·독일 등 일부 현대 민주주의 국가가 사법부에게 행정부와 입법부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위헌심사권을 부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다수결 원칙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다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다수결 원칙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자칫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헌법에 명시돼 있는 소수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헌법을 다수결 원칙의 상위에 두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헌재의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헌법은 추상적이라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사법부의 권력은 입법부나 행정부와 달리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남용의 정도와 부작용이 더욱 심할 수 있다. 위헌심사제도가 처음 시작된 미국도 사법부가 지나치게 정치적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행정부와 크게 충돌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뉴딜 입법이 계속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받자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법원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통해 대법원의 정치개입 자제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 이후 미국 대법원은 소위 '자제주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판결을 자제하고, 주로 소수자의 기본권 보호를 위한 사건에 전념하는 전통을 가지게 됐다.
여기서 한국 헌재가 그 동안 내린 주요 판결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다. 판결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이처럼 평가가 엇갈린다는 사실이 그 판결의 정치적 성격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만 헌재가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사용할 때 그 권력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이나 의견을 내세우거나 혹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민 다수의 여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헌법에 보장된 소수의 기본권 보호를 우선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사법부가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데에는 정치권의 잘못도 크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에 떠넘기거나, 선거구 획정 불합치 사례와 같이 심각한 문제를 방치해 둠으로써 사법부의 개입을 초래해 왔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권이 앞으로도 사법부에게 정치적 판단을 맡길 생각이라면, 독일의 경우처럼 헌재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인정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현행 대통령 중심의 판사임명 방식을 바꿔 입법부와 정당의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정치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법부의 지나친 정치 개입을 줄이거나, 아니면 정치적 책임성을 증가시키거나, 이 두 가지 방안중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사법부가 정치를 좌우하는 사법민주주의의 폐해가 앞으로 심각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김 욱 배재대 정치언론안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