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남북대화가 이슈로 떠올랐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로 당장 정상회담이 열릴 것처럼 언론들이 난리다. 남북대화를 통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하는 것은 국민들이 원하던 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남북대화에 성급히 뛰어들었다가 자칫 '쪽박'을 찰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열렸던 남북대화 학습효과로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벌써 이를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신년인사회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보다는 "통일이 이상이나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구현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준비와 실천에 최선을 다해 나아가겠다"고 원론적으로 밝힌 것은 '보여주기식'의 남북정상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옳은 지적이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요즘 새삼 깨닫는다. 아직도 헌법에는 여전히 주적(主敵)인 북한, 그 곳의 지도자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를 대한민국 종편들이 앞 다퉈 생방송으로 내보냈어야 했었느냐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자. 순전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나는 북한의 대남매체가 을미년 새해 벽두부터 '대화'와 '통일'을 일제히 쏟아내고 있는 것이 미심쩍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강도높은 대북 제재 행정명령을 내리고, 우리가 그 말에 동의했음에도 우리 정부와 박 대통령을 비난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그동안 우리는 남북대화 직후, 이해할수 없는 북측 태도와 그들의 뒤통수 치기 전략에 수없이 많은 정신적, 물질적 상처를 입었다. 남북대화는 양측이 진정성 있는 접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 성과를 차근차근 쌓아올릴때 비로소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한다.

양측의 고위급 관계자들이 판문점에서 또는 서울이나 평양을 왕래하면서 회담을 갖는다고 해서 남북대화가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을 하고, 합의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좋아졌는가. 그때 뿐이었다. 2007년 판박이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고 남북관계가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서해교전이, 천안함 폭침이, 연평도 포격이 일어났으며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가 가장 좋았다는 김대중정부 시절, 실향민 1세대들이 원했던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생사확인.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만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다면 서신왕래. 편지를 보내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의 거부로 무산됐다. 그럼에도 김대중·노무현정권은 이를 강력히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로또 복권 당첨같은 몇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만일 그때 두 정권이 남북대화 결렬을 감수하면서까지 북에 생사확인과 서신왕래를 강력히 요구해 관철했다면, 남북관계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희망을 걸었던 남북대화의 기대감이 산산이 부서졌을때, 받는 상실감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남북관계의 화해는 1세대 실향민들의 생사확인, 서신왕래, 가족 상봉 3박자가 체계적으로 이뤄질때 진정성을 갖는다. 위대한 통일을 이룬 독일은 몇번의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변함없이 생사확인과 서신왕래, 그리고 만남이 이뤄진 후 통일의 기쁨을 맛보았다. 우리는 남북이 분단된 후 이땅에는 다양한 빛깔을 가진 정권들이 탄생했었다. 모든 정권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했지만 그것은 모두 '보여주기식'에 불과했고, 남북대화를 정치적으로 이용만 했을 뿐이다. 실향민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절절히 느끼면서, 그들을 위해 남북관계를 풀어 보려고 했던 정권은 단언컨대 아무도 없었다. 을미년 새해 벽두부터 고위급 남북대화가 논의되고 있다. 이번에 남북대화가 이뤄진다면,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1세대 실향민을 위해서라도 생사확인과 서신교환을 우선 추진해보길 바란다. 실향민 1세대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이번에도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가질 것이다. 박근혜정부는 정치성이 가미된 남북대화로 더이상 1세대 실향민들이 실망감으로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 자신들의 부모가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하며 무려 70년동안 울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마음가짐으로 진정성있게, 차근차근 남북 관계 개선에 임해주길 바란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