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를 만든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지금도 내 주변에 있는
각별한 친구들과 선배들인
다양한 ‘인천사람들’ 입니다


백구번지(숭의동109)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저는 도화동 박문여고 앞 동네로 이사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제물포역을 통해 전철을 타고 대학으로 통학했습니다. 이후 서울의 몇 군데 연구원을 다니다가 인천발전연구원의 창설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10여 년의 목동 생활을 제하면 거주지도 대부분 인천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새삼스럽게 ‘내게 인천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 까닭은 요즘 이곳에서 자주 거론되는 ‘인천가치’ 때문입니다. 인천이 가진 값진 가치를 드러내 부족해 보이는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고, 또 이를 물리적 장점으로 삼아 지역 발전의 토양으로 개발해 가자는 주장들이 점차 큰 파장으로 퍼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내겐 인천가치가 어떤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는가?

인천가치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인천은 제게 좋고 밝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인천하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우리 마을은 늘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의 악다구니로 힘찬 역동성(?)을 보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동네엔 좀도둑들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또한 이른바 양공주들이 서넛 살았던 우리 마을로 주말이면 미군 장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들락거렸고, 이런 구체적 사례 덕에 우리들은 중학생인 동네 형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성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늦봄 쯤 되면 우리 동네엔 저도 꼭 참여해야 하는 연례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똥차가 전도관밑 백구번지 마을에 들어서면서 시작되는, 마을 전체가 자기네 변소를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우리 할머니가 제게 부여한 과업(?)은 우리 집 변소 앞에서 똥지게 수를 정확히 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던 저는 늘 할머니로부터 핀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제가 셈에 집착한 나머지 충분한 양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넘치도록 퍼가야 한통에 몇 십 원했던 비용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인천에 대한 제 기억 중 주요한 또 하나는 늘 주변에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활이 피면 좀 더 나은 곳으로 옮기고, 돈을 벌면 서울로 가고 형편이 괜찮으면 상급학교는 서울로 가는 식이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적지 않은 수의 급우들이 서울로 전학을 가곤 했는데 개중엔 저와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더러 있어 한동안 쓸쓸함을 감내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엔 반대로 외지에서 온 많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마침 서울은 고교진학이 추첨으로 바뀌었고 인천은 한 해 뒤로 예정되어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저희 고등학교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교내 서클 활동을 했던 제겐 이때가 제 삶의 과정에서 일종의 황금기였다 할 수 있습니다. 공부에 대한 부담이 작진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서로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학내 서클 활동 덕에 선배들로부터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고, 대학생 형들로부터는 어렴풋이나마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깨달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인천가치’는 그래서 제겐 사람들의 가치로 다가옵니다. 오늘의 저를 만든,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을 들라면 저는 서슴없이 지금도 제 주변에 있는 각별한 친구들과 선배들을 떠올립니다. 제게 있어 인천이 가진 의미와 큰 가치는 여기 몰려들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도 인천의 큰 가치는 많은 수의 다양한 인물들이고, 인천을 인천답게 그리고 가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도 바로 많은 인천사람들이란 게 제 생각입니다.

인천에 좋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하고 이들이 여기 제대로 터 잡고 살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여기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참에 지역 R&D 인재들을 육성하고 인물을 키우는 가치 있는 과업에 인천을 구성하는 모든 주체와 기관들이 관심을 갖길 기대해 봅니다.

/이용식 인천발전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