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의 침략으로 중국이 쇠퇴해갈 때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뒤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 호시탐탐 식민지침략을 노렸습니다.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했습니다.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정부군을 물리치고 전라도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는 중국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하면서 톈진조약에 의거, 일본에도 파병 사실을 알렸습니다. 소식을 접한 일본은 이번이 청나라를 물리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청군과는 달리 큰 규모의 육군을 인천과 부산으로 상륙시키는 한편 해군으로 아산만 입구의 풍도에서 청의 수송선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풍도해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청군은 성환 월봉산을 주진지로 삼고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인천항으로 상륙했던 일본군은 우선 한양을 점령한 뒤 삼남대로를 따라 과천과 수원을 거쳐 평택시 소사동에 진을 쳤습니다.
전초전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튿날 소사벌에 허장성세를 보인 뒤 어둠을 틈타 성환 일대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일명 ‘성환전투’로 명명된 이날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8월 1일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소사벌과 성환 일대에서 전개된 청일전쟁은 이후 평양성전투, 황해해전을 거쳐 일본의 승리로 끝을 맺습니다. 일본의 승리는 한반도의 운명 과 동북아시아의 판도변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수천 년 이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소사벌 일대에는 몰왜보(일본군이 몰살된 보), 청망평(청군이 대패한 들판) 같은 지명이 전해옵니다. 청일 양군의 각축에 하소연할 곳 없던 백성들이 외쳤던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한탄도 민중들의 삶 속에서 되뇌어지고 있습니다. 역사란 기억 속에서 잊혀질 때 비로소 수명을 다합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전개된 두 번의 전투는 민족자존의 의미, 동북아시아의 평화적 공존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반도가 이제는 침략의 희생양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평화의 중심으로 거듭나기를 꿈꿔봅니다.
/김해규 평택 한광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