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행보 뒤 ‘찜찜한 사인’
아시안게임서 금메달 쟁취하자
열악한 조건에 ‘경기 출전 통보’
전국체전 출전하자 “계약 위반”
대한복싱협마저 국대선발 불허
“선수보호 커녕 눈치본다” 지적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한국 복싱의 간판’ 신종훈(26·인천시청). 그는 지난해 10월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라이트플라이급(49㎏ 이하) 정상에 오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복싱이 12년 만에 일군 값진 금메달이었다.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오랜 침체기를 걷고 있는 한국 복싱에 모처럼 희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그런 신종훈이 국가대표 선발전에 뛸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내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 쿼터(1·2위)가 걸린 오는 10월 카타르 도하 세계선수권에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복싱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신종훈은 영원히 권투 글러브를 벗고 링에 서지 못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 있다.
# 프로복싱 무대 꿈꾸던 신종훈
신종훈은 국제복싱협회(AIBA)가 운영하는 프로복싱(이하 APB) 무대에 설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인천시체육회와 인천시복싱협회, 대한복싱협회 관계자 등의 말을 종합하면 AIBA는 지난 2012년 4월 신종훈에게 APB 해당 체급에서 랭킹 6위 안에 들면 올림픽 출전권을 주기로 약속했다.
대한복싱협회는 신종훈이 APB에서 얻는 수익의 30%를 받기로 했다. 3자 간 계약이 이뤄진 것이다.
이 계약대로라면 신종훈은 APB 랭킹 결정을 위해 2012~2013, 2013~2014 두 시즌을 뛰어야 했다. 하지만 AIBA는 경기를 열지 못했다. 결국, AIBA-신종훈-대한복싱협회는 지난해 4월 인천에서 만나 재계약을 하기로 했는데, AIBA 측이 사전 연락 없이 불참하면서 계약이 다시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달쯤 지났을까. AIBA 측에서 신종훈을 찾아왔다. 인천 아시안게임 복싱 국가대표로 선발된 신종훈이 대회를 앞둔 지난해 5월 전지훈련 중이던 독일로 직원을 보낸 것이다.
영문으로 된 문서를 건네받은 신종훈은 주저했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그는 ‘마음이 바뀌면 무효화할 수 있다’는 AIBA 한국인 직원의 말에 결국 서명을 했다. 신종훈은 “그 서명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당시를 후회했다.
# 신종훈은 왜 링에 서지 못하나
신종훈은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보란 듯이 금메달을 따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독일에서 신종훈이 서명한 문서를 AIBA 측이 계약서라고 주장하며 지난해 11월 중국에서 열린 2014~2015 시즌 APB 사전 랭킹전에 출전할 것을 통보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굳이 프로복싱 무대에 갈 이유가 없었다. 신종훈은 APB 사전 랭킹전 대신에 당시 일정이 겹쳤던 전국체육대회(10월28일~11월3일, 제주도)에 인천 대표로 출전했다.
AIBA는 앞서 신종훈에게 전국체육대회에 나갈 경우 계약 위반인 만큼 신종훈과 대한복싱협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묻고 신종훈의 선수 자격을 정지할 수 있음을 경고했었다.
신종훈은 AIBA와의 갈등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주변의 격려를 받으며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신종훈은 예상했던 대로 AIBA로부터 모든 국내·국제대회 출전을 잠정 금지한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현재 AIBA는 징계위원회를 통해 신종훈의 계약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대한복싱협회가 오는 13일 시작하는 ‘2015 국가대표 2차 선발대회’에 신종훈의 출전을 불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인일보 3월11일자 15면 보도) 지난해 12월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 뛰지 못했던 신종훈은 최근 대한복싱협회에 참가 신청을 했으나 마감일인 10일이 다 되도록 승인이 나지 않아 마음을 졸여야 했다.
끝내 국가대표가 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이다. 인천 체육계 안팎에선 대한복싱협회가 자국 선수 보호는커녕 AIBA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올림픽에 나가 국위를 선양하겠다는 복싱 청년의 꿈까지 짓밟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종훈 사태와 한국 복싱의 미래
11일 오후 인천문학경기장 주변에서 우연히 만난 신종훈은 잔뜩 풀이 죽어 보였다. 하루 간격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그였다. 신종훈은 지난 9일 저녁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을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아들을 도와달라!”며 추운 겨울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도 불사했던 신종훈의 어머니 엄미자(48)씨도 연락을 받고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하지만 신종훈은 불과 하루 뒤인 10일 오후 대한복싱협회의 출전 불허 통보를 받았다.
신종훈은 충격이 컸던지 “힘내라!”는 사람들의 격려에 늘 밝고 씩씩했던 평소와는 달리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AIBA가 신종훈에게 내릴 징계 수위에 대해선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법적 공방으로 간다면, 신종훈이 독일에서 서명한 문서가 계약서로서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최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2년 최초 계약이 3자(AIBA, 신종훈, 대한복싱협회)가 모인 가운데 이뤄졌다가 지난해에는 따로 서명한 이유, 신종훈 서명 과정의 절차상 하자 여부, 최초 계약 불이행 책임 소지 등 따져봐야 할 부분들이 많다.
물론 그전에라도 문화체육관광부와 인천시 등이 한국 복싱 발전과 선수 보호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준다면 꼬일 대로 꼬인 이번 사태에 극적인 반전이 생길 수도 있다.
/임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