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하고 느낄때 다가온다
그래야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이 되어 한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아파트 담장이 달라지고 있다. 산수유와 매화의 향이 봄기운을 알리더니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담장 울안에서 개나리꽃 망울들이 서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람 심장만 수술하며 살던 나로서도 출근길에 보이는 밝은 봄의 전령들을 보면서 마음이 화사해짐을 감출 수 없다. 봄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삶은 그래도 행복하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인생의 피곤함에 지쳐가면서 어쩌면 나도 모르게 원치 않는 것들에 취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취미로 즐기는 영화, 운동, 등산, 음악, 미술 등이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도 하지만 때로는 술과 노래에 취하기도 하고 도박이나 음식에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파스칼이 말하듯이 무언가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의 공간’이 우리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 공간을 무엇인가로 채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자만이라고 느끼는 주말이면 봄길을 걸으며 은빛 행복을 꿈꾸는 시심을 가져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잊히지 않은 하나의 몸짓’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가 있다. 운율이 좋고 의미가 마음에 들고 외우기가 쉬워서 즐겨 암송하는데 좋은 자리에서 건배사 대신 읊어주곤 한다. 여기에 ‘길’이라는 말이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이름과 같아서 더 마음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시는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순수를 사랑한다. 소위 먹고사는 일과는 상관없지만 마음에 드는 시를 외우거나 좋은 책을 읽고 음미하는 감동은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하루 일을 끝내고 술과 회식으로 하루를 피곤하게 마무리하는 것도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아담한 찻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앉아서 시를 암송해보는 여유도 우리는 필요한 것이다. 시와 문학을 알아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 있듯이 우리 마음에는 시를 읊을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시는 함축이다. 시는 감동이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에 표지처럼 통속’하지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의 기차역에서 시는 우리를 울게도 만들기고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게도 한다. 사랑은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고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대학 때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1970년대 대학을 다녀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포스터에서라도 보았을 만한 연극인데 사무엘 베케트의 원작을 연극화한 것이다. 당시 대학초년생으로 문사철에 대해 깊이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두 사람이 고도를 기다리며 나누는 기차역에서의 대화가 이렇게 따분하고 참 이상한 연극도 있구나 의문을 품기도 하였다. 왜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이렇게 어려운가? 이후 사무엘 베케트의 다른 작품과 그의 문학세계를 조금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그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그 인생의 따분함이야말로 사무엘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란 걸 알게 됐다. 그 사무엘 베케트는 언젠가 말했다. ‘인생은 자신의 허허로움을 이겨내는 과정이라고...’.
이제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자신이 ‘눈을 뜨고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담장 넘어 전해주는 개나리의 따사한 봄길이 주는 의미 앞에서는 인생의 허허로움은 잊어버리고 봄이 오는 기대감에 시인처럼 마음이 설렐 뿐이다. 인생은 누구나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다가 오지도 않는 고도에 지쳐가는 따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겐 ‘스스로 봄길이 되어’ 걸어갈 수 있는 선택이 주어져 있다.
시는 절대로 그냥 다가오지 않는다. 감탄하고 놀라고 피부로 느끼고 스스로 다가갈 때 시가 다가온다. 그래야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되고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이 되어 한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4월의 봄길을 채우는 우리 경인일보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박국양 가천대 의학전문대학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