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박장, 비상구 막고 밤새기도
허술한 화재대비 사고 불보듯
복통 호소에 승무원은 알약만
평균나이 70세의 보따리상들
“긴급 상황엔 죽어야지” 한숨
승객 4명 =컨테이너 1대 운임
화물 한개라도 더 실으려 노력

■ 눈 감은 안전
지난 9일 오후 8시께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중국 웨이하이로 가는 A해운사 국제여객선(길이 185.5m, 폭 26.8m)이 정박한 모습은 마치 바다 위에 ‘빌딩’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이공들 사이에 섞여 배에 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객실 흡연자 벌금: 3만원, 罰金 200元’이라고 쓰인 경고문이었지만, 승객들은 바닥에 깔린 카펫에 거리낌 없이 재를 떨며 떠들어댔다.
승객을 대규모로 수송하는 기차·비행기 등은 모두 흡연이 엄격히 금지되는 반면 선박의 경우 아무런 법적 규정이 없어 흡연 무법지대와도 같다. 4층에는 아예 흡연실까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정원 750명의 초대형 국제여객선이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화재 대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화재 발생시 문에 달린 자석식 전기장치가 작동, 자동으로 문이 닫혀야 하지만 걸쇠로 고정돼 있어 정상 작동될지는 미지수였다.
승객들의 무질서도 위험을 키우고 있다. 밤이 어두워지자 5층 ‘LOBBY’ 구역에는 갑판으로 통하는 비상구까지 가로막고 테이블 2개가 설치, 점당 100원짜리 고스톱, 세븐포커판이 생겼다. 한 편에는 도박이 하루이틀이 아닌 듯 믹스커피와 녹차티백까지 준비돼 있었다.
도박판의 한 구경꾼은 “술 마시며 도박으로 밤을 새우는 일은 빈번한 일”이라고 귀띔했다. 환자 발생 시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잠든 지난 10일 오전 3시30분께 복통 환자로 가장해 안내데스크를 찾았지만, ‘순찰중(巡察中)’이라는 팻말만 올려놓은 채 당직 근무자는 사무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설치된 비상용 전화기는 통화음도 나오지 않았고, ‘호출(呼出)’ 버튼도 먹통이었다.

의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팅부동(못알아듣겠다)’이라며 손사래 칠 뿐이었다. 선의 또한 중국인 한의사 1명뿐으로, 식중독 등 다량의 환자 발생 시 속수무책이다.
보따리상 B(66)씨는 “주요 승객인 보따리상들의 평균 나이는 70세 정도다. 심장마비 같은 긴급 상황이 생기면 죽는 수밖에 없다”며 “선의가 한국어를 알아듣기는 해도 복통, 두통, 감기 등 간단한 한국어만 알고, 자세한 진단은 내리지 못한다”고 전했다.
밤중 갑판으로 나가보니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쳤고, 바닷물이 올라와 미끄러운 상태였다. 난간은 성인 남성의 골반 높이(1m가량)로, 음주가 가능한 점에 미뤄보면 실족사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실제로 지난해 말 이 배에서 60대 남성이 사라졌다가 닷새 만에 시신으로 발견됐지만, 갑판에는 CCTV 등이 전혀 없어 사인을 밝히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 사람보다 돈이 먼저
지난 12일 오후 3시(중국시간)께 중국 룽청에서 평택으로 가는 C해운사 국제여객선의 탑승이 시작됐지만 실제 출항은 이날 오후 7시40분 이뤄졌다. 갑판에 나가 보니 컨테이너가 짧게는 2~3분마다 한 대씩 적재되고 있었다. 승객이 화물을 기다리는 상황이 계속됐던 것이다.
길이 4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의 운송비는 매번 다르지만 최대 미화 약 600달러 정도로, 14일 기준 65만7천300원 가량이다. 반면 이 배의 선실 ECN 등급(8~48인실) 운임은 580위안(약 10만5천원)으로, 승객 4명의 운임이 컨테이너 1대 운송비와 비슷하다. 사람보다 화물을 다량으로 실을수록 해운사의 이익이 커지는 구조다.
한 선박 전문가는 “해운사는 승객이 아니라 화물로 먹고 산다. 100% 싣게 되면 승객을 한 명도 태우지 않아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산동성으로 화물을 운반하는 해운사가 평택 4곳 등 10여개에 달해 각 해운사마다 화물 적재율이 60~70%에 머무른다. 컨테이너를 1대라도 더 실으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C해운사 관계자는 “출항이 늦어지는 것은 중국 현지 공무원들의 문제로, 승객보다 화물을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중국 웨이하이·룽청/민웅기·강영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