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국회 정면충돌 시사… ‘갈등 최소화’와 어긋나
행정마비·권력분립 침해 ‘헌법가치 훼손’ 근거 미약
지난주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입법부와 청와대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있다. 청와대는 개정안이 행정입법을 국회가 과도하게 제한함과 아울러 삼권분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고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모법의 취지나 내용을 위반한 시행령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는 국회의 권한은 정당한 입법권의 행사라는 입장이다.
이 사안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충돌과 여권내 정치지형의 두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각론은 더 복잡한 양상이다. 당청간의 갈등을 기본축으로 당내에서 친박과 비박의 대결구도가 노골화될 수 있다. 반면에 살아있는 권력을 의식하여 새누리당 지도부가 몸을 낮출 수도 있다. 여권내의 갈등이 증폭될 수도 있고 수면 아래로 잠복할 수도 있다. 여권내의 역학관계의 변화도 나타날 수 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새누리당이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지거나 설령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청와대를 의식한 새누리당 지도부가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수정을 가하고자 한다면 여야 관계는 가파른 대치국면을 피할 수 없다.
한국은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된 제도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제의 작동 원리가 입법·행정·사법의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것이지만 우리의 권력구조는 입법부와 행정부 권력의 융합이란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현역의원이 국무위원을 겸할 수 있는 구조, 대통령의 법률안 제출권도 그 예다. 그러나 청와대가 대통령 특보와 현역의원의 겸임으로 권력분립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을 때는 침묵하다가 이번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서 권력분립에 위배 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는다.
대통령과 입법부는 모두 국민의 선출에 의한 헌법기관으로서 이원적 정통성을 갖는다. 따라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교착과 대립은 대통령제의 숙명이기도 하다. 집권당의 의석보다 야당의 의석이 많은 분점정부의 경우에 대통령이 야당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야당을 설득함으로써 소수 정권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분점정부가 정국의 교착을 가져올 개연성이 있으나 여소야대 정국을 의미하는 분점정부 상태가 국정 운영을 마비시킨다는 논리는 그래서 타당하지 않다. 같은 논리의 연장에서 청와대가 국회의 시행령 수정을 강화한 법안을 권력분립의 위배라고 보는 건 논리의 비약이다. 입법부가 행정부의 시행령 자체를 일일이 간섭한다는 것이 아닌 바에야 모법의 취지에 합치하지 않는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이번 국회법 개정안에서 시행령에 관한 수정 변경요구가 강제성을 갖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조정이 가능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권력현상이다. 권력을 획득·쟁취하고자 하는 세력간의 다툼이 정치의 기본 요소다. 권력을 어떻게 통제하고 어떤 제한 조건하에 두느냐 하는 방식이 민주주의의 원활한 작동에 사활적이다. 다수가 모든 힘을 독점하게 될 때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입법부의 불안정, 관료들에 의한 자의적이고 빈번한 권력의 행사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선한 정부냐 악한 정부냐에 대한 기준은 정부가 다수의 지배하에 있느냐, 소수의 지배하에 있느냐의 기준에 있지 않고, 그 정부가 얼마나 많이 혹은 조금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느냐 라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인민에 의한 권력 통제의 확대과정이다. 보통선거권의 확대 과정이 민주주의 발달의 역사다. 구체적으로는 입법부 권능의 확대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입법부가 과도하게 행정부를 압박한다면 권력분립은 위협받고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분립의 침해라는 논리로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된 개정안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자체가 해법을 더 꼬이게 할 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구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헌법 정신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국회와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청와대의 태도는 정치를 통한 갈등의 최소화와 거리가 멀다. 국회법 개정으로 행정부가 마비되거나 권력분립이 침해되어 헌법적 가치가 훼손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여전히 미약하다.
/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