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했던 원칙주의 무너진 ‘동네병원’으로 전락
불안한 지배구조 전세계 헤지펀드에 그대로 노출
이상하다. 어떻게 이지경까지 됐을까.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애플과 한 판 겨룰 수 있는 지구 상 유일한 기업, 삼성 얘기다. 삼성이 이상하다. 지난 5월 1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의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지냈고, 부친 이건희 회장이 맡았던 자리를 물려받는다는 점에서 그룹 경영권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승계된 상징적인 조치이며, 마침내 ‘이재용의 삼성 시대’가 개막됐다고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그러면서 삼성이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지배구조를 갖추고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데서도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당부도 했다. 그로부터 한달 뒤, 1982년 설립된 이래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보육사업을 펼쳐왔던 삼성생명 공익재단이 1994년 건립해 운영 중이던 삼성 서울병원이 메르스 2차 진원지로 지목되면서 부분 폐쇄됐다. 이재용 부회장이 국내외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한달만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큰 사고 앞에는 늘 전조(前兆)가 있는 법이다. 지난 11일 메르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에서 “삼성병원이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국회의원의 지적에 삼성병원 감염내과 과장은 “국가가 뚫렸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삼성병원의 반박에 회의장은 술렁였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신속히 사과를 하고, 재발방지 약속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을 삼성이었다. 그런데 일개 과장이 사과 대신 국가에 책임을 전가하는 말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그로부터 3일 후에야 삼성병원은 고개를 숙였다. “모든 국민이 고통받는 엄중한 시점에 신중치 못한 발언이 나왔다”며 “대규모로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으로서 집단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데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삼성병원의 개원은 종합병원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환자를 잘 수술해 달라거나 봐달라며 환자가족이 고마움의 표시로 의사와 간호사에게 주었던 ‘촌지’라는 관행을 없앤 것도 큰 파격이었다. 촌지를 받은 의사와 간호사를 파면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최고의 의료진 , 최고의 시설로 환자의 수술과 관리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다른 대형병원들의 서비스도 크게 향상됐다. 한국 의료수준이 한단계 상승한 것이다. 이렇게 삼성은 늘 ‘1등주의’를 표방했다.
개원초 환자 가족 1인에 한해 병실출입이 가능했고, 시간을 정해 환자면회시간을 철저하게 지켰던 ‘원칙주의’ 삼성병원은, 그러나 이제 7세 어린이도 부모 손을 잡고 응급실을 무상 출입할 수 있는 ‘동네병원’으로 전락했다. 슈퍼전파자로 알려진 14번 환자가 병원 이곳 저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병을 옮겨도 그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는 병원이 됐다. 메르스 확진 환자의 절반 이상이 삼성병원내에서 감염됐다. 삼성병원 의사인 138번 환자는 발열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격리되지 않고 10여일간 회진을 다녔다. 언론들은 자만심이 부른 치욕이라고 했지만, 이 지경이 된 것은 삼성생명 공익재단이 순수한 설립이념을 스스로 망각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삼성그룹은 지금 미국 헤지펀드 엘리어트 매니지먼트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을 통해 후계자 승계작업을 끝내려던 일정도 차질을 빚고 있다. KCC에 자사주를 매각하는 등 방어에 나섰지만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에 엘리어트를 몰아낸다 해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 어쩌면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설립이념이 완전히 무너진 삼성병원에 메르스가 침입해 삼성제일주의를 와르르 무너뜨렸듯, 삼성그룹의 허약하고 불안한 지배구조는 이제 전 세계 헤지펀드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그 틈을 노리고 내성을 가진 더 강력한 제2 제3의 엘리어트가 공격을 감행할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삼성병원을 보면 마치 삼성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섬뜩하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