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1970년 11월 25일. 군복을 입고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한 사내.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하듯 소리치는 마흔 다섯살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다. 그가 일본 육상 자위대 동부지역 건물 옥상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 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들은 사무라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는 것인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없는가.” 사령관실을 극우주의 ‘방패 모임(楯の會)’ 무리들과 함께 난입해 사령관을 인질로 잡고 1천여명의 자위대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군국주의 부활’을 외쳤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그 다음이 광기(狂氣)의 절정이다. 셋푸쿠(切腹)에 이은 카이샤쿠(介錯). 할복에 이어 옆에서 목을 쳐주는 사무라이 의식인 고전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겁을 먹어서인지 찌른 상처는 겨우 10센티미터 이고, 목을 베기로 한 자는 칼을 다루지 못해 목을 세번이나 내려쳤다는 것 쯤은 사족(蛇足)으로 치자.

아무튼 ‘일본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글을 쓴 전후 최대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무사도’를 일본정신의 원형으로 생각해 검도를 끔찍이도 좋아했다. 194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데뷔한 첫 작품 ‘가면의 고백’은 동성연애자의 내밀한 풍경을 다뤄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그의 이름을 알린 것은 단연 56년작 ‘킨카쿠지(金閣寺)’다. 전후 일본의 황폐함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는 계기가 되었다.

45년 전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고 죽었던 그가 지금 한국 문단을 강타하고 있다. 한국 최고의 여류소설가 신경숙의 작품 ‘전설’이 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때문이다. 표절작품이 천왕에 대한 충성과 동료들에 대한 우정으로 자살하는 극우주의자 젊은 장교의 이야기인 ‘우국(憂國)’이라는 점이 실망이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변명. 어쩐지 궁색하고, 공허하다. 표절시비는 피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침묵할 수록 일은 커지게 마련이다. 작가의 결단이 요구된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