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들어와
나라 발칵 뒤집어 놓은 ‘메르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
전염병·가뭄에 우왕좌왕하는 우리
경제는 선진국 진입했을지 몰라도
의식은 빈곤상태 머물러 부끄럽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컸다. 자연시간에 콜레라·페스트·장티푸스·발진티푸스 등 외래어로 된 이름을 가진 병은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을 전염시키고 죽이는 무서운 병이라고 배웠다. 전염병에도 급수가 있어 콜레라 등은 1종 전염병이고, 뇌염·공수병·말라리아 등은 2종 전염병이라는 것, 콜레라는 ‘호열자(虎列刺)’, 페스트는 ‘흑사병(黑死病)’이란 무서운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주위에서 그런 병으로 죽은 사람을 보진 못했어도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꽤 오래갔다.

전염병보다 더 징그럽고 무서웠던 것은 기생충과 관련된 기억이다. 매년 실시하는 채변검사에서 많은 아이들 몸에 기생충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학교에서 무상으로 나눠주는 산토닌을 먹고 대변과 함께 배출된 기생충을 확인하는 것은 끔찍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공원 같은 곳에서 정체 모를 약장수들이 보여주는 사진과 유리병 속의 거대한 기생충들이었다.

1960년대는 위생시설이나 물 사정이 형편없었다. 많은 사람이 공중화장실이나 공동수도를 이용했고, 도시 변두리의 아이들은 여름에 멱감기도 쉽지 않았다. 여름에도 그러니 겨울에는 한 달에 한 번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도 호사였다. 또 그때는 유난히 가물었는지, 여름이면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벼가 타 들어가는 사진이 신문에 종종 실렸다. “물 쓰듯 하다”란 말은 어떤 물건이 너무 많고 흔해 흥청망청 마구 사용한다는 뜻인데, 요즘 도시 사람처럼 아침 저녁으로 샤워를 한다는 건 당시엔 상상도 못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적·정치적 진보를 이뤄 조만간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동참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도 화장실이 깨끗하고, 사람들은 물을 “물 쓰듯” 쓰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메르스’란 질병이 들어와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중동 낙타에게서 전염된다는 병에 걸린 여행객과 그를 진료하고 간호하던 의사와 가족들에 의해 삽시간에 널리 퍼져 확진자만 160명이 넘었고 사망자도 이십 명에 이르렀다. 일부 지역의 초중등학교는 휴업을 했고, 거리의 상점마다 장사가 안된다고 난리인데 메르스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정부는 병원 탓을 하고 병원에선 “국가가 뚫렸다”고 책임을 회피하며 개인은 정부와 병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인다. 정부와 병원, 개인이 모두 ‘네 탓’만 할 줄 알았지 ‘내 잘못’이었다고 반성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적·정치적 ‘기적’을 이뤄냈다고 자랑해왔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그것은 모두 원칙과 절차를 무시한 채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든 당연한 응보였다. 어떤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각종 날림 및 부실공사를 부추겼고, 고지식하게 원칙을 따지는 사람은 융통성 없다고 배척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대형사건이 발생하면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책임을 떠넘겼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 일을 씻은 듯이 잊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나도록 그 일에 책임진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중부지역의 가뭄이 매우 심각하다. 한강 하류의 강물을 논에 대느라 강바닥이 드러나고 고기떼가 마른 강을 새하얗게 뒤덮은 사진을 보며 참담함을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염병은 전형적인 빈곤병이다. 그리고 인류 문명은 치수(治水)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전염병과 가뭄에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는 우리는, 경제는 선진국에 진입했을지 몰라도 의식은 빈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부끄러울 뿐이다.

/장영우 동국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