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때 훈구파·사림파 갈등 심화
밥그릇 싸움에 당쟁으로 변질
지금의 야당 ‘친노·비노’ 다툼
여당의 친박·비박·원박…
다양한 ‘~박’그룹 분화를 보니
사색당파 조선시대같아 안타까워


언론에서는 연일 여야 수뇌부 갈등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여야의 정치적 권력투쟁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사색당파 붕당정치를 생각하게 된다. 생각과 뜻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 정치적 의견을 나타내는 붕당정치는 의견의 다양성을 기반으로 정책 대결을 한다는 측면에서 민주적 권력 분립에서 강조되는 견제와 균형 (Check & Balance)을 위한 비교적 긍정적 정치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선조에 의해 도입된 붕당정치는 당쟁의 상징이 됐고, 조선이라는 국가 몰락의 근원으로 평가된다. 무엇이 민주적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붕당정치를 정권 몰락의 근원으로 전락시켰을까?

우선, 조선의 붕당정치가 실패한 이유는 붕당정치가 권력의 민주적/합리적 운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료들의 밥그릇 싸움을 위해 활용됐기 때문이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훈구파의 비대해진 권력에 불안해하던 선조는 재야 지식인들을 대거 기용해 서로 경쟁시켰다. 이 과정에서 재야 지식인 집단인 사림파의 관료화로 전체 양반/관료의 수가 늘었고 이들에게 지급할 녹봉/토지 수급의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관직의 세습 문제까지 겹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심화 됐다. 결국 붕당정치가 당쟁으로 변질 된 가장 큰 이유는 밥그릇 싸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진 야당의 친노와 비노 간 갈등과 여당의 친박과 비박 간의 이전투구가 공천이라는 여야 붕당들의 밥그릇 싸움 때문인 것 같아 걱정된다.

둘째, 선조의 붕당정치가 당쟁으로 전락한 이유는 요직에 대한 자리다툼 때문이다. 조선시대 당쟁은 문반 관료의 인사권을 쥔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에서 시작됐다. 이조전랑직은 종 5품·6품의 낮은 자리이지만,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옥당)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관례로 임명되는 자리로 삼사의 공론을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하고,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하며,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에 오르는 요직이었다. 따라서 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권력 경쟁의 핵심 과제였다. 지금 야당이 차기 총선 공천에 영향을 미치는 당 사무총장 자리를 놓고 계파 간 갈등을 빚는 것과 동인과 서인이 이조전랑직을 놓고 다투는 것이 흡사하다는 사실이 기막히다.

셋째, 조선시대 붕당정치가 왜곡된 이유는 붕당이 사색당파로 세분화 되면서 당쟁의 정도가 더욱 심화 됐기 때문이다. 초기의 붕당정치는 훈구파와 사림파 상호 간 정책 대결이었지만 당쟁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그 과정에서 다시 이합집산이 이루어졌고 집단 내 골품을 따지며 갈등이 심화됐다. 그런데 최근 여당에서는 친박, 비박 논란에 이어 원박, 범박, 심지어 짤박까지 다양한 ‘~박’ 그룹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박으로 불리는 국회의원이 사무총장 자리에서 멀어지자 10여명만이 진짜 친박이라는 배타심이 문제라며 친박 핵심들의 배타성을 비판했다. 각종 ‘~박’의 집단으로 분화되는 여당을 보니 사색당파로 갈렸던 조선시대가 연상돼 안타깝다.

일본 식민사관론자들은 한국인들이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 좋아하는 민족성을 가져 망국의 길을 걷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한민족 당파성론은 식민주의적 역사 해석과 함께 국권탈취를 합리화/정당화하고 한국인에게 패배주의 의식을 심어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됐다. 이 때문에 붕당정치를 왜곡시킨 밥그릇 싸움, 요직 다툼, 그룹 내 골품제 논란 등은 오늘날 정치인들이 복철지계(覆轍之戒)의 금과옥조로 삼아야 한다. 실제로 구한말 정치인들이 이를 잊었을 때, 광복이후 정치인들이 이를 잊었을 때 역사적으로 외적이 침입하거나 전쟁이 일어났고 국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이제라도 오늘날 정치인들은 이 역사적 교훈에 주목하기 바란다.

/홍문기 한세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