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 구제 희망담아 이름없는 석공들 조각
궁예·송문주 등 실존인물에 기반한 작품도


예로부터 안성은 교통과 상업의 요지였습니다. 동서쪽으로 삼남대로와 영남대로가 지났고, 교통의 중심에는 안성장, 죽산장이 발달했습니다. 상업이 번창하면서 안성장에는 유기(鍮器)공업도 발달했습니다.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에는 허생이 이곳에서 삼남의 과일을 매점매석 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지형적으로 안성은 충청도 속리산에서 출발한 한남금북정맥의 종착점입니다. 튼실한 산맥은 신라 말 기훤이나 조선 시대 임꺽정 같은 영웅호걸들의 활동무대였고, 수많은 전란의 격전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민중들은 변혁을 꿈꿉니다. 문란한 정치, 탐욕에 눈이 먼 수령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릴 때는 미륵의 재림을 꿈꿨습니다. 미륵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라는 인도어에서 온 말입니다.

미륵은 도솔천에서 설법하다가 56억77천만년 뒤에 재림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미래불입니다. 그러므로 미륵불은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안성은 미륵의 고장입니다. 안성의 미륵들은 대체로 이름 없는 석공들이 조각했습니다. 그래서 규모는 크지만 투박한 것이 많습니다. 안성시 죽산면 죽산미륵당의 매산리석불입상은 한양에서 부산까지 연결된 영남대로의 길목에 있습니다. 본래 이곳에는 고려 시대 태평원이라는 원(院)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평미륵이라고도 부릅니다. 태평미륵은 규모가 매우 큽니다. 언제 조성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미륵당 옆에 고려 후기 대몽항쟁지였던 죽주산성이 있어, 죽주산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송문주 장군을 추모하고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할 뿐입니다.

안성시 삼죽면 국사암에는 기솔리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기솔리석불입상은 일명 ‘궁예미륵’이라고 부릅니다. 신라 말 궁예는 미륵 세상을 꿈꾸며 죽주(죽산)의 기훤에게 의탁했습니다. 하지만 기훤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궁예는 원주의 양길에게로 갔다가 나중에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합니다.

궁예가 죽산에 머문 것은 1년에 불과하지만 미륵 세상을 염원하던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궁예 미륵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안성대농리석불입상은 일명 대농리미륵으로 부릅니다. 높이는 2.2m로 다른 미륵에 비해 작지만 안정된 자세와 부드러운 미소가 지친 민중들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자애로운 미소로는 안성시내의 아양동미륵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특히 아양동 미륵은 마을과 가까이 있어 오랫동안 마을미륵으로 섬김을 받았습니다.

본래 안성 땅이었던 평택시 소사 1동에도 미륵이 있습니다. 1.2m 높이의 작은 미륵은 삼남대로를 지났던 여행자들의 안식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도 안성의 미륵들은 작은 암자의 앞마당이나 대로(大路)의 길목,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에 지친 민중들을 위로하고 미래의 꿈과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지금도 미륵을 만나러 갑니다.

/김해규 한광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