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는 189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43세의 짧은 삶을 살았던 분으로 그분이 진정 원했던 해방의 아침을 못 보고 1941년에 돌아가셨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만 홍난파 일생은 짧고 남긴 영향력은 길다. 오늘은 음악교육자로서 난파의 행적을 따라 걸어보려 한다.
난파가 음악을 배운 것은 꽤 어려서부터다. 태어난 이듬해에 서양문물 도입의 관문인 서울 정동으로 이사했고, 새문안교회에 다니며 선교사로부터 음악을 접했다. 13살 때에 완구악기로 된 바이올린을 사서 도레미 법을 배웠고 독학으로 악보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식민지 조국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일본과 미국에서 음악을 배우고 돌아온 홍난파는 음악계의 원로로서 영향력을 끼쳤다.
홍난파가 음악후배들에게 가르친 교훈은 그가 남긴 콩쿠르 심사평으로 남아 오늘날의 교훈이 되고 있다.
1935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1회 조선남녀음악현상경연대회에서 대회 심사위원장인 홍난파는 “백 명의 입선자를 내는 것보다도 한 사람의 음악가를 얻으려는 것이 콩쿠르 사명이요, 의도임을 깨달아주기를 바라는 바이다”고 말했다. 콩쿠르 참가자 모두가 음악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져줄 것과 자신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자신에게 내리는 가장 엄정한 심판이라고 강조했다. 홍난파는 1938년 제3회 음악콩쿠르에서도 심사위원 대표를 맡았는데 그의 가르침은 천재적 예능보다도 인격적인 노력이었다. 음악 콩쿠르 직전에 홍난파가 신문에 기고한 제목은 ‘참다운 예술가는 인격을 지켜라’ 였다. 그는 기고를 통해 대예술가는 친분과 노력이 겸비했다. 또 고상한 인격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74년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난 홍난파가 살아간 길 자체가 인격이었고 끊임없는 인격교육 강조했다. 홍난파가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혀 비난을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에 대해 충분히 알고 비난을 할 지, 칭찬을 할 지를 정해야 한다. 선 연구 후 평가(先 硏究 後 評價)가 필요하다. 그것이야 말로 홍난파 자신이 평생을 강조했던 인격적인 방법이다.
/신도성 경기도음악협회 난파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