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일상에 순치된 자기반성의 의미
두명의 의사통해 ‘직업인의 영혼’ 진지하게 고민
정치·교육·복지… 우리 사회 절실한 수식어구


언젠가부터 ‘영혼 없는’이라는 수식어구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영혼 없는 박수, 영혼 없는 진행 등 다소 부정적인 표현에 자주 쓰인다. 기자 또한 ‘영혼 없이 산다’는 말을 가끔 내뱉곤 한다. 기계적인 일상에 순치돼버린 데 대한 자조적 표현이다. 물론 자기반성의 의미도 담고 있다.

얼마 전 직업인의 영혼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가 있었다. 아들의 진료차 들른 병원에서였다.

의사는 거침이 없었다. 중학생 환자를 앞에 두고 그 의사는 친절하게도(?) 끔찍한 수술과정을 적나라하게 설명했다. 순간 겁에 질려 사색이 된 녀석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녀석이 받을 충격에 걱정이 앞섰다. 아이를 애써 진정시키는 보호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의사의 거침없는 소견발표는 그치지 않았다. 그 소견이 100% 정확하다 하더라도 의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게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문을 나서면서 녀석은 “다리에 나사를 박아야 하느냐”며 결국 눈물을 글썽였다.

물론 그 의사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 팩트(fact)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가 미성년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먼저 보호자를 불러들여야 하는 게 옳았다. 우리 사회에서 미성년자는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보호의 대상 아니던가.

온전치 않은 밤을 보내고 다음날 대학병원으로 옮겨 진료를 받고 나서야 일가족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저 같으면 하나도 걱정 안합니다.” 전날과 확연히 다른 의사의 말은 배려를 넘어 ‘구원’이었다. 다시 전날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진료실을 나올 때 귓전을 스치던 말, “MRI는 꼭 찍어봐야 합니다.” 상업적 수완은 있을지 몰라도 그에게서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영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각기 다른 영혼을 경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 역시 의사였다. 성장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그는 보호자와 상담을 할 때 당사자인 자녀는 절대 진료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치료비 상담까지 해야 하는데 부모가 금전적인 여력이 없어 치료를 포기할 경우, 자녀가 “돈 때문에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며 부모를 원망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차가운 금속이 환자에게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의사시절 청진기를 늘 가슴에 품었다는 한 의사가 떠올랐다. 이어진 말은 더 인상적이다. 그는 성장판이 얼마 남지 않아 큰 효과가 기대되지 않는데 부모가 치료를 고집할 경우, “키 좀 작으면 어떠냐. 몇cm 더 키우자고 막대한 돈을 들이느냐”며 만류를 한다고 한다. 그럴 때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보호자로부터 항의를 받기 일쑤인데 “선생님이 키가 작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냐”는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들었다고 한다. 어느새 그의 작은 키는 풍요로운 영혼에 가려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사실 ‘영혼’을 거론해야 하는 대상은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혼 있는 정치, 영혼 있는 교육, 영혼 있는 복지…. 우리 사회에 절실한 수식어구가 아닌가 싶다.

/임성훈 인천본사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