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華城)은 장자 ‘천지편’에 나오는 ‘화인축성(華人祝聖)’의 고사에서 유래됐다. 화성이라는 이름에서 정조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장수와 부귀와 번창을 기원하는 도시, 왕의 입장에서는 요(堯)임금같이 덕을 펴는 도시라는 두가지 였다. 정조의 꿈은 수원 화성 주민들이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하는 낙원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화성을 축조하면서 내린 교서는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가볍게 하는데 힘쓰라. 혹시라도 백성을 병들게 한다면, 비록 공사가 빨리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였다. 정조는 공사에 참여한 70여만명 인부들의 원망을 사지 않기 위해 반나절까지 계산해 품삯을 지급했다.
한양도성이 남향인 반면, 화성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양의 경복궁과 창덕궁 정문이 남쪽을 향해 서 있지만, 화성의 행궁(行宮)은 팔달산 아래에 동쪽을 바라보도록 건축됐다. 그래서 화성의 간선도로는 동서가 아닌 남북 방향으로 났다. 도성이 방어에 초점을 맞춘 폐쇄적인 형태였다면, 화성은 소통을 중시하는 개방적인 면모를 보인다. 한성과 충청도·전라도를 잇는 곳에 위치한 화성 신도시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발전을 거듭했다.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시전이 생겨나는 등 상업이 흥했다. 수원이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가 된 이유다.
그런 수원이 전국에서 성범죄자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됐다. 신상정보가 공개된 성범죄자 4천489명 중 92명이 수원에 살고 있다니 모골이 송연하다. 오원춘·박춘봉은 강력 범죄의 대명사가 됐다. 수원 팔달구의 강간 위험도가 전국 1위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효의 도시’ ‘강력범죄의 도시’ 두 얼굴을 갖게 된 수원. 정조가 지하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