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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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5·끝)에필로그]작품·작곡가 소개 '음악하는 행위' 주목 지면기사
흥미로운 사실들과 그 의미 다뤄클래식과 더 친숙해질 기회되길우리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외래음악을 수용했다. 고대에는 서역(西域) 음악을, 중세에는 중국 음악을,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에는 서양 음악과 접촉했다. 고대에는 불교가, 중세에는 유교가, 근대에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외래 음악을 전하는 데 한몫했다.중세까지 우리 조상들은 외래음악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음악을 창출했다. 일례로 중앙아시아의 음악을 수용하면서 주체적으로 장구와 거문고를 창안했으며, 우리를 비롯해 중국과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등으로 유입된 인도 장단인 딸라(Tala)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장단으로 분화했다. 이 밖에 세종대왕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궁중무용음악을 만들면서 외래음악인 고취(鼓吹)악을 참조했다.근대에는 우리 음악과 체계, 사상적 기반이 완전히 다른 서양 음악이 전래했다. 그로 인해, 수용자에게 가해진 파급력과 충격은 더욱 컸다. 또한 '서양의 것을 학습해 빠르게 선진화'하려는 시대 정신과 함께 우리 고유의 것을 탄압한 식민지시기의 일제로 인해 서양 음악을 주체(반성)적 인식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는 바로크와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수학과 합리성이 극대화한 서양 음악(클래식)을 우리 땅에서 맹목적으로 추종한 연유가 됐다.과거 서양 음악의 추종자였던 우리는 현재 'K-팝'과 'K-클래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여러 뮤지션들을 배출하고 있다. 세계 음악계를 이끄는 우리 음악인들의 행보에 전 세계 팬들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이번 75회로 글을 맺는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은 제목처럼 클래식을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목적에서 2019년 3월8일 시작됐다. 재미있게 읽힐 사실들과 함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악보로 기록된 작품과 작곡가를 비롯해 '음악을 하는' 행위를 일컫는 '연주'와 '감상(수용)'까지 두루 이야기했다. 글들 중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에 관한 이야기(47·66)와 클래식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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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4)합창]함께 맞춰 노래하는 합창 인천서 시작 지면기사
교회 번창하며 지역 문화 정착1954년 '메시아 전곡' 무대 유명'합창(合唱)'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맞춰서 노래를 부르는 것, 혹은 그 노래이다. 음악적 의미는 다성(多聲)악곡의 각기 다른 성부의 멜로디를 각각 두 사람 이상의 여러 사람이 부르는 것을 합창이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성부를 부르는 것은 '제창', 각 성부를 한 사람씩 맡아 부르는 것은 '중창'으로 구분한다.서양의 문화와 종교는 19세기 말 주로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음악 또한 그랬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인천 중구 내동의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첫 개신교회다. 교회 예배당에서 찬송가를 불렀으며, 이후 교세가 번창하면서 교회 안의 찬양이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인천 음악(합창) 문화'는 이렇게 형성됐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내리교회 성가대는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공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리교회 성가대는 한국전쟁 직후 '메시아'를 번역해 전곡을 부른다는 계획을 세웠다. 성가대원인 이선환에 의해 전곡 악보가 3권(총 1천200여권)으로 만들어졌다. 악보는 1954년 2월부터 8월까지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해 완성됐다. 악보 완성 후 성가대원들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고, 그해 성탄절을 앞두고 역사적인 공연(지휘·김춘하)을 했다.1952년 내리교회 성가대원이 주축이 돼 인천시합창단(지휘·최영섭)이 발족한 이후 역사와 전통의 인천 합창단들이 속속 창단했다. 호산나합창단(1958년), 대한어머니회합창단(1966년), 샤론합창단(1968년), 인천남성합창단, 인천장로성가단, 한국부인회합창단(이상 1971년), 인천YWCA합창단(1974년), 로고스합창단(1976년), 인천여성합창단(1977년) 등이 오늘날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 합창단과 한국전쟁 후 인천에서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92), 국내 합창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윤학원(83) 전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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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3)국가(國歌)]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때 연주된 '아리랑' 지면기사
안익태곡 대신 채택해도 좋을듯프랑스에선 작곡자 정정 사례도프랑스의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2년 독일 등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하려 했을 때 알자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했던 공병 대위 루제 드 릴이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들어서도 민중 사이에 폭넓게 불린 이 노래는 1879년 프랑스 국가가 됐다. 그러나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비오티가 1781년 작곡한 작품이 2013년 발굴되면서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발굴된 작품과 '라 마르세예즈'의 멜로디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루제 드 릴이 프랑스에서도 활동했던 비오티의 해당 작품을 접한 후 그 선율에 가사를 붙인 걸로 보인다. 현재 프랑스 국가의 작곡자는 비오티로 정정됐다. '라 마르세예즈'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에 인용됐다.1880년 러시아 황제는 1812년에 러시아를 침공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 후퇴를 기념하는 행사를 거행하기로 한다. 이에 기념곡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추천을 받은 차이콥스키가 곡을 쓰기 시작해 한 달여 만에 완성했다. '1812년 서곡'은 1882년 8월20일 모스크바의 그리스도 구세주대성당에서 열린 전승 기념행사에서 초연됐다. '1812년 서곡'은 서서히 전운을 드리우는 1부, 러시아군의 출진과 프랑스군의 침공이 어우러지는 2부,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격렬한 전투 이후 러시아의 승리를 알리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3부로 구성됐다. '라 마르세예즈'는 이 작품에서 프랑스군의 침공 때 단편적으로 드러난 이후 양국의 전투와 퇴각 때 어우러진다. 반대로 러시아를 의미하는 민요들은 작품 요소요소에 나타나며, 곡의 클라이맥스에선 제정 러시아의 국가인 '신이시여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대포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양국 국가를 활용한 전개는 서사적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며, 20분 정도 걸리는 이 작품을 표제음악의 걸작으로 올려놨다. 단, 프랑스에선 잘 연주되지 않는다.조선과 미국은 1882년 5월 인천(제물포)에서 수호통상조약을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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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2)브람스를 좋아하세요]43세에 첫 교향곡 발표한 거장 지면기사
우상 베토벤 전통 계승 중압감총 4곡 완벽한 합일체 만들어클래식 음악 학도들의 꿈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지난달 16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드라마 속 음악들로 구성된 앨범이 얼마 전 출시되는 등 그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이다. 사강은 1959년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발표했다. 사강은 이 소설에서 파리를 배경으로 중년 여인 폴의 사랑과 연관된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해 냈다.폴 보다 14세 어린 시몽은 둘 만의 시간을 가질 기회를 모색하며 폴에게 편지를 보낸다. "오늘 6시에 플레옐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제목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대목이다. 1961년엔 이 소설을 아나톨 리트박 감독이 영화화했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미국에선 '굿바이 어게인', 우리나라에서는 '이수(離愁)'로 각각 개봉했다. 소설에선 폴과 시몽이 공연장에서 브람스의 협주곡을 듣는다고만 표현된다. 영화에서 둘이 감상한 작품은 교향곡 1번과 3번이다. 브람스는 교향곡을 네 곡 작곡했다. 네 작품은 정사각형의 네 변과 같이 강력한 힘과 완벽함의 합일체를 이룬다. 한 작곡가의 교향곡 전곡이 이처럼 안정되고 집중력 있는 경우는 브람스와 그의 우상인 베토벤을 제외하곤 찾기 힘들다. 브람스는 43세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다. 베토벤이 세운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선뜻 작곡에 임하지 못했던 거였다. 때문에, '교향곡 1번'은 브람스가 늘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보던 대상(베토벤)에 걸맞은 형식과 성숙함으로 우뚝 서 있다. 균형 잡힌 베토벤의 '교향곡 8번'에 비견되는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의 3악장은 영화에서 주제음악 역할을 했다. 멜로디가 아름답고 로맨틱해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브람스의 처연한 음색과 깊은 상념을 간직한 남성적인 울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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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1)실내악]왕과 귀족 사랑방 채운 '행복 사중주' 지면기사
교향곡·오페라 비해 섬세함 매력하이든이 확립·베토벤 명곡 남겨'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가 지난달 서울 곳곳에서 8일 동안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해 봄이 아닌 가을이 돼서야 개최될 수 있었고, 좌석 띄어 앉기로 진행됐다. 올해로 15회째를 맞은 이 축제는 실내악(Chamber Music)의 묘미를 알려주는 국내 음악제로 유명하다.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선 "교향곡을 듣고 오페라도 듣다가 가장 나중에 듣게 되는 것이 실내악"이라는 말이 통용된다. 음악 장르 중 실내악은 즐기기 쉽지 않다는 것을 빗댄 것이다.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준 말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와 현악 사중주, 브람스의 목관 오중주 등을 듣고 느낄 수 있는 여운과 행복감은 그 무엇에 비길 수 없다. 교향곡이나 오페라에 비해 상당 부분 비워낸 실내악은 섬세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실내악의 사전적 의미는 한 악기가 한 성부씩 맡아 연주하는 기악 합주곡이다. 성부 수에 따라 이중주, 삼중주, 사중주, 오중주 따위로 나뉘는데, 바이올린 둘, 비올라 하나, 첼로 하나의 현악 사중주가 실내악의 중심이다. 실내악이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어 '무지카 다 카메라(Musica da Camera)'에서 왔다. 극장이나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구별하기 위해 17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다. 21세기에 '카메라'라면 사진기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당시 카메라는 왕이나 귀족의 저택 안 사랑방을 의미했다. 유추해 보면, 실내악은 바로크 시기에 왕이나 귀족의 소규모 홀에서 소통과 교류를 통해 친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하이든에 의해 현악 사중주 형식이 확립됐다. 베토벤은 현악 사중주 열여섯 곡을 남겼다. 이 곡들은 베토벤의 아홉 개의 교향곡, 서른 두 개의 피아노소나타와 함께 인류의 위대한 음악 유산으로 남아있다. '작은 교향곡'이라고도 불리는 현악 사중주의 명곡들은 19세기에 슈베르트와 브람스, 드보르자크, 20세기에 쇤베르크와 버르토크, 쇼스타코비치 등이 남겼다. 우리나라에선 1930년대 '체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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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0)오케스트라 ③]광복 직후 시작된 '한국의 오케스트라' 지면기사
그리운 금강산 작곡 최영섭 지휘애협 교향악단이 인천시향 '뿌리'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광복 직후 시작됐다. 1945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 교향악단이 창단했다. 훗날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제2대 지휘자로 부임하는 고(故) 임원식은 고려 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가 됐다. 하얼빈 제일음악학원과 도쿄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임원식은 당대 우리나라 유일의 전문 지휘자였다. 그러나 6개월 정도 후 사임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려 교향악단의 재정난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2년 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0월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고려 교향악단은 해체했다. 단원들은 서울 교향악단으로 흡수됐다. 1947년 12월 인천 관현악단이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과 애관극장 등을 공연장으로 사용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활동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주춧돌을 놓았다. '인천 음악애호가협회(필하모닉)'는 1956년 산하 교향악단을 발족했다. 인천 애호가협회 교향악단은 후일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는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 30여명으로 구성됐다. 1957년 11월에 열린 연주회에서 애협 교향악단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협연했다. 최영섭은 1964년 동아방송 편곡자와 지휘자로 스카우트되어서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애협 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인천 필하모닉이 창단했다. 애협 교향악단원들은 새 오케스트라에 편성됐다. 10여회의 연주회를 연 인천 필하모닉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체가 되었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제물포고 음악교사로 있던 26세의 김중석이었다. 창단 초기 인천시향의 주 레퍼토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 작품을 비롯해 낭만주의 전반부까지였다. 임원식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연주하며, 레퍼토리를 확대했다. 제4대 지휘자 금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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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9)오케스트라②]'필하모닉' '교향악단' 시작은 달랐다 지면기사
'필' 후원 통해 운영 동아리 지칭20세기 의미 퇴색, 구분도 사라져'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12편(2019년 5월 24일자 1면=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2)런던 빅 파이브와 토머스 비첨]'후계자 포기' 유산으로 만든 오케스트라)에선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공연 활동을 펴고 있는 오케스트라들 중 오랜 역사와 뛰어난 연주력을 갖춘 다섯 단체를 일컫는 '런던 빅 파이브'에 대해 다뤘다. 단체들 중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교향악단으로 표기)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현재까지도 런던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세계의 음악팬들을 만나고 있다. 런던 외에도 오스트리아 빈, 독일의 베를린과 뮌헨,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엔 필하모닉과 교향악단이 별개의 단체로 존재하며, 각각의 연주 활동을 펴고 있다.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면 혼동하기 쉬운 이 같은 명칭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하는', '좋아하는'을 의미하는 '필(Phil)'과 화음을 뜻하는 '하모닉(Harmonic)'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필하모닉'은 1800년대 초기 시민 사회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동아리를 지칭했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자신들의 자금(후원)으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데, 왕실이나 정부, 시가 운영하는 형태와는 차별성을 강조하며 필하모닉으로 명했다. 교향악단은 관현악의 최고 장르인 '교향곡(Symphony)'을 연주하는 단체라는 점을 부각했다.20세기 들어서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고 오케스트라의 재정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필하모닉의 의미는 퇴색했다. 오히려 교향악단이 과거 필하모닉의 경우처럼 후원자 그룹의 지원을 받는 경우도 생겼다. 그 때문에 현재 필하모닉과 교향악단은 명칭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형태와 수준 등 여타 차이점을 찾거나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미국 프로야구를 예로 들어보자. 뉴욕(양키스와 메츠)과 시카고(화이트삭스와 컵스)엔 메이저리그 소속 연고 팀이 두 개씩 있다. 필하모닉과 교향악단도 팀 명칭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현대 오케스트라와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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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8)오케스트라 ①]말러 '교향곡 8번' 연주에 1천명 필요 지면기사
그리스시대 노래 하던 공간 의미'4관 편성' 후기 낭만주의서 확립오케스트라(Orchestra)는 관현악 또는 관현악단을 지칭한다. 관(管)과 현(絃)을 비롯해 타(打)악기를 사용해 연주하는 곡의 총칭 및 그러한 악기 편성에 의한 연주단체를 말한다. 오케스트라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시대 원형극장의 정면 무대에선 무희들이 춤을 추거나 가수들이 노래했는데 이 공간을 '오케스트라'라고 불렀다.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와서 '합주단'을 뜻하는 말로 변했다. 오케스트라의 현재 모습은 언제 갖춰졌을까. 교향곡이 확립된 초기 고전주의 시기 오케스트라의 인원은 고작 30~35명 선이었다. 제1·2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로 구성된 현악 주자들이 20명 안팎이었다. 여기에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이 각각 2명씩, 호른과 트럼펫이 각 1~2명씩으로 구성돼 10여명의 관악 주자와 타악(팀파니) 주자가 가세했다. 이러한 오케스트라의 형태를 '2관(管) 편성'이라고 한다. 플루트와 오보에 등과 같은 목관악기를 2개씩 배치한 편성이라는 뜻이다. 18세기 후반, 관악기의 성능이 향상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욱 큰 규모의 현악 파트가 필요해졌다. 또한 귀족들만의 오락이었던 음악을 중산층이 즐기기 시작하면서 많은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큰 연주 홀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때문에, 같은 2관 편성이라도 이전 시기와 비교했을 때 오케스트라의 인원은 2배 넘게 늘어난 70명에 달했다.현재 공연장에서 주로 볼 수 있는 100~120명으로 구성된 '4관 편성' 오케스트라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인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의해 확립됐다. 특히 말러의 '교향곡 8번'엔 '천인(千人)'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 작품을 연주하는 데 1천 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0년 뮌헨에서 열린 '천인 교향곡'의 초연엔 858명의 성악가가 참여했으며, 특수 악기를 포함해 오케스트라 단원은 171명으로 구성됐다. 지휘자까지 포함하면 초연 무대엔 1천30명이 올랐다.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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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7)지휘자②]지휘계 거장, 피아니스트가 많은 이유 지면기사
두 손 완전 독립… '멀티' 특화조율·외우는데 익숙함이 도움브루노 발터, 조지 셸, 드미트리 미트로폴로스, 게오르크 솔티, 레너드 번스타인.'위 인물들의 공통점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단번에 20세기 지휘계의 거장들임을 알아맞힐 것이다. 그 외에 하나 더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이 꽤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피아니스트로서도 뛰어난 커리어를 쌓았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지휘와 피아노의 거장으론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다니엘 바렌보임, 정명훈, 미하일 플레트뇨프 등을 꼽을 수 있다.19세기 들어서 오케스트라의 편성이 커지고, 그만큼 큰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게 되면서 필요하게 된 전문 지휘자는 주로 건반(피아노) 연주자 출신들이었다. 대표적 인물로 펠릭스 멘델스존, 한스 폰 뷜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구스타프 말러 등이 해당한다. 연주자들의 역할이 세분화하는 20세기 이후엔 처음부터 지휘자로 기반을 닦고 잔뼈가 굵어진 이후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피아노 등을 연주하면서(했거나) 지휘자로도 명성을 얻는 기조는 어느 정도 이어졌다. 그에 따라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경력이 지휘자에게 어떤 장점으로 작용할까'에 대한 의문과 질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답변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몇 가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피아노 연주는 두 손이 완전히 독립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두 줄의 음악을 동시에 읽어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또한, 실내악에서 자신 이외의 파트까지 포함한 악보를 보는 것은 피아노 연주자뿐이어서 피아니스트는 조율하고 외우는 데 익숙하다는 견해도 있다. 즉, 피아노 연주가 지휘에 도움을 주는 부분으로 양손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더욱 쉽게 악보를 읽을 수 있는 능력, 반주를 다루는 능력, 많은 양의 곡을 외우는 능력 등을 꼽을 수 있다.발터는 생전에 "훌륭한 지휘자는 자신만의 분명한 내적 이미지 또는 이상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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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6)한글날과 우리 음악]'K-클래식' 주춧돌 놓은 윤이상 지면기사
서양음악 '주체적 인식' 시도전통 유산 연결 가곡 등 남겨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인 한글날에 'K-클래식'의 초창기를 반추했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말과 글, 음악을 탄압했다. 여기에 더해 기독교와 함께 들어온 서구의 찬송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바꿔놓았다. 우리 음악을 듣고 즐기던 감수성이 서양식 노래를 듣고 즐기는 감수성으로 바뀐 거였다.이 시기 우리 작곡가들은 주로 노래를 만들었다. 아쉬운 점은 서양음악의 유입과 수용에 집중한 작곡가들이 고려하지 않은 '한국적 음악'이었다. 당시 우리 음악은 소위 말하는 '작가 정신'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아닌, 새 문화를 공감하고 즐겼던 음악인들의 산물이었다. 가사에 대한 정서로 인해 한국적 애환이 묻어난다는 평가도 받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주 붙은 서양 노래의 틀에 민요적 가락과 장단을 도입한 정도다. 즉, 도래한 서양음악에 대한 반성이나 한국의 고유 음악양식에 대한 추구 없이 만들어진 거였다. 우리 음악계에서 서양음악에 대한 반성(주체)적 인식을 도모했던 작곡가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1956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가기 전 국내에서 가곡과 기악곡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950년부터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때 동요 70여곡을 작곡했다. 당시 초등학교 1~6학년 음악책에 수록된 동요 100여곡 중 윤이상의 작품이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동요 다음으로 많은 윤이상의 곡은 교가다. 해방 직후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전 고향인 통영의 문화협회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통영공립여자중학교 등에 재직한 윤이상은 4년 동안 시인 유치환, 김상옥과 함께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는 아홉 개에 이르며 학교마다 특색을 살려서 만들어졌다.윤이상이 한국 생활기에 발표한 가곡을 비롯한 작품들은 우리 전통 음악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함께 활동했던 안기영, 김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