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 시민곁 70년, 의정부 미군기지… 함께 살아갈 '한 길' 열리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6)]

    시민곁 70년, 의정부 미군기지… 함께 살아갈 '한 길' 열리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6)] 지면기사

    '캠프레드클라우드' 관통 도로 개방 1953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전쟁·냉전 유산 전형적인 경기도 소재 '전쟁 문화 유산' 모습초기 건축물·용도 시설물 현재까지 다수 남아의정부 도시경관 한축… 유기적 기능도 의미근현대사적 중요성·활용도 고려 보존 방침60여개 건물 역사적 가치로 존치 의견 전달 지난해 7월 1일은 의정부 시민에게 뜻깊은 날이었다. 70년 동안 닫혔던 도심 속 미군기지 캠프레드클라우드(CRC)의 문이 열렸다. 경민대학교 방면에서 의정부 종합운동장까지 먼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운전자들은 캠프클라우드를 관통하는 2차선 도로로 고작 2분이면 반대편에 닿을 수 있다. 이 도로가 개방되기까지 70년이 걸렸다.캠프레드클라우드는 경기도 전쟁 문화 유산의 가치와 보존, 그리고 문화 유산 전승을 위한 지역의 역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도시 한가운데를 꿰찬 과거 유산이 현재를 사는 시민들에겐 무슨 의미일까란 물음에서 시작한다.의정부시 가능동, 녹양동 일대 83만6천㎢가 미군에 공여된 건 1953년 7월 3일의 일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당시 연합야전군사령부(CFA)가 이곳에 주둔했다. 이후 1953년부터 1972년까지는 미군 제1군단이 주둔했는데 1957년 5월 미 의회 대훈장을 받은 레드 클라우드 상병의 이름을 기려 캠프레드클라우드라는 명칭을 받았다.미 24사단 19연대 E중대 소속 레드 클라우드 상병은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캠프레드클라우드는 1971년 변화를 맞는다.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은 피한다', '미국은 아시아 제국과의 조약상 약속은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대처해야 할 것이다'란 내용을 담은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의 영향이었다.미국의 막대한 군사적 비용 지출과 베트남전으로 인한 반전 여론으로 내려진 닉슨 독트린이 캠프레드클라우드에서 미군 제1군단과 제7사단 철수로 이어졌다. 캠프레드클라우드의 탄생과 변화 모두 한국전쟁과

  • 과거와 현재 100년… 역사 잇는 공간 '안양기독보육원'[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5)]

    과거와 현재 100년… 역사 잇는 공간 '안양기독보육원'[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5)] 지면기사

    '타자 할아버지' 오긍선 박사의 '좋은집' 정신 이어받다 유년시절 보낸 이영운씨, 학교 다닌 덕에 무사히 사회 정착아이들 영농기술 가르치려 힘써 '우장춘 박사' 초빙하기도재원 마련 위해 손수 편지 써… 항상 타이프 치던 모습 기억3천명 거쳐간 곳인데 정신 깃든 공간은 낡아 용도 잃기 직전 "안양기독보육원에서 다같이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우고… 사회 나가서도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곳이었지."6살무렵 안양기독보육원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보낸 이영운(74)씨에게 보육원의 의미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이었던 당시 보육원에서 같이 지내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던 기억을 늘어놨다."나는 학교 다닐 때 줄곧 모범생이어서 더 어린 초등학생들을 앉혀놓고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내가 가르쳐주니까 점수가 안나오던 애들이 시험에서 100점도 맞아오고 그래서 뿌듯했던 기억이 나. 그렇게 큰 방에서 책상 놓고 다같이 공부도 하고, 밥 시간 되면 식탁에 둘러앉아 밥도 먹고 그랬지. 당연히 춥고 배고픈 기억도 나지만 단체생활은 어딜가나 춥고 배고프고 졸린 건 똑같지 않겠어?"이영운씨는 보육원에서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운 덕분에 성인이 되고 군대에 다녀와서 무사히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그는 보육원에서 받은 도움을 후배들에게 돌려주고자 기우회를 꾸려 아동복지시설 좋은집에 학용품이나 간식 등을 베풀고 있다고 한다. 좋은집은 안양기독보육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해당 부지에서 운영 중인 아동복지시설이다.그가 기억하는 오긍선 박사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꼭 영농기술만큼은 가르쳐주려 노력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우장춘 박사까지 보육원으로 초빙해 아이들이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숙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닌, 언젠가 보육원을 나가서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는 삶의 기반을 꾸려주고 싶었던 오긍선 박사의 정신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보육원 타자 치는 할아버지' 오긍선 박사오긍선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6·25 전쟁 당시 피난

  • 고교 한 귀퉁이 '석축건물'… 아픈 역사, 흔적만 '덩그러니'

    고교 한 귀퉁이 '석축건물'… 아픈 역사, 흔적만 '덩그러니'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4)] 광복 - 안양 양명고교 현대식 건물 사이 '안양기독보육원' 일제강점기·한국전쟁 기간 고아 보살펴과거 교직원 사택 용도 사용… 현재 방치폭격 폐허 복구 미군 관계자 참여 가능성오긍선 박사 설립 역사적 가치 충분하지만학생들 의미 알지 못해 문화재 지위 위협안양시 양명고등학교 건물들 옆 한 귀퉁이에 낯선 석축 건물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비닐로 감싸진 지붕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기인 돌이 박혀있는 벽면, 벽면 사이 솟아있는 굴뚝까지. 요즘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의 건물이다.이 건물은 1953년께 지어진 '안양기독보육원 의무실'이다. 지난 4일 찾은 안양 양명고등학교에서 이 건물을 찾아내긴 어렵지 않았다. 테니스장과 음악실을 지나치자 나온 부지에 누가 봐도 역사성을 지닌 건물이라고 추정할 만큼 뜬금없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식 건물들 옆으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의무실 건물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의무실 건물은 지난해까지는 학교 직원의 사택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용도를 잃어버린 상태다. 건물 외관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지붕을 받쳐주는 목자재 곳곳에 빈틈이 보였다.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은 건물 입구 쪽 창문 밑에 박혀있는 정초석이다.정초석 또한 세월을 맞아 대부분의 글자가 지워진 상태다. 정초석에 있는 희미한 글자는 'IN HONOR OF MAJ HUGH T. TORRANCE OWO GUY T. HAWHEE'인 것으로 추정('MAJ'와 'OWO'는 명확하지 않은 글자)된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안양기독보육원의 설립자인 오긍선 박사가 미군과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미군관계자가 시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의무실 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는 구조다. 각각 진료실, 입원실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중 입원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내부엔 3개의 방과 화장실, 주방으로 쓰인 흔적이 남아있

  • 300만 조선인 희생 서린 근대화 '빛과 그림자'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3)]

    300만 조선인 희생 서린 근대화 '빛과 그림자'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3)] 지면기사

    광복 - 북한강의 첫 전력시설 가평 청평댐 수상관광 레저 핵심지에 담긴 아픈 역사일본 전범기업 주도했던 프로젝트 일환1945년 해방 이후 전기생산 주요 인프라연인원 300만명 동원 공식 사망자만 43명철도가 그렇듯 전력시설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편리함과 환경오염 같은 현대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땅 위에 처음 철도가 놓였던 일, 처음 전기를 생산했던 일을 말한다.전범기업 하자마구미(間組)가 만든 고양 쌍굴. 서울로 운반할 석탄을 옮길 요량으로 만든 이 터널을 공사하며 지역민 500여명이 숨졌다. 지금도 고양 쌍굴 근처 화전동 공동묘지에서 이들을 기리는 위령비를 찾아볼 수 있다. 차량기지인 경성조차장에서 출발한 열차는 쌍굴을 통해 경성으로 이동했고 경의선을 따라 물자를 옮겼다.경성~개성~평양~신의주로 이어진 경의선은 한반도 주요 도시의 근대화를 이끈 열차였다. 이처럼 철도는 근대화에 공헌한 중요한 인프라지만 건설의 목표는 '수탈'이었고 건설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숨져갔다. 전력시설도 마찬가지였다.하자마구미는 압록강에 수풍발전소를 만들었고, 또 다른 전범기업 카지마구미(鹿島組)는 가평에 청평댐을 지었다. 청평댐이 건설되기 전 북한강은 춘천과 인천까지 수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고 한다. 유려한 풍광을 자랑하던 북한강 뱃길에 댐이 들어서게 된 건 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중일전쟁(1937~1945) 초기 인천 군수공장에 댈 전력이 급해진 데다 경인 지역 공업화·도시화로 일제는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산세가 가파른 북한강에 댐을 짓기로 했다.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가 설립됐고, 공사는 카지마구미가 맡았다. 1939년 8월 착공해 1943년 10월 준공(1·2호기)된 청평댐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의 주요 인프라가 된다. 전기생산시설인 수력발전댐 대부분이 수력자원이 풍부한 북한의 압록강, 두만강, 장진강 등에 설치된 탓에 한국에선 청평댐과 화천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48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전력 수급이 어려워진 게 대표적인 예시였다. 여기에 청평댐은

  • '잊힌 선로' 교외선, 80년 기다림 끝에 다시 경기북부 달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2)]

    '잊힌 선로' 교외선, 80년 기다림 끝에 다시 경기북부 달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2)] 지면기사

    2004년 여객운송 중단됐던 일영역 부활 고양~양주 연결… 일제 강점기 추진물자 수송 목적 계획·분단으로 단절1961년 개통된 이후 관광 목적 강화주요 승객 대학생 'MT 문화 메카로'현재 폐허처럼 변했지만 과거엔 붐벼연말 재개통 목표 '새로운 추억' 기대고양~양주를 잇는 교외선은 '고양 쌍굴'(4월 30일자 5면 보도=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과 같은 목적으로 계획됐다. 쌍굴이 경성수색조차장과 경의선을 연결하기 위한 터널로 만들어졌다면 교외선은 경의선으로 수송되는 물자를 서울 시내로 곧장 들이지 않고 서울 동북부로 우회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된 노선이다.철도가 근대화의 상징이자 수탈을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자 수송이라는 교외선의 주목적은 해방과 분단 국면에서 변화를 맞는다.노선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부터 추진됐지만, 분단으로 단절되며 활용이 어렵게 된 것이다. 교외선의 한쪽 끝인 고양은 신의주부터 내려오는 경의선과 연결되고 동쪽 끝인 의정부는 경원선과 연결돼 국토 중앙에서 이어지도록 계획한 것이었으나 신의주-원산 모두 분단으로 오갈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다.1944년 2월 착공, 1945년 8월 공사가 중지된 교외선의 운명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1961년 7월 10일 능곡~가릉역 구간이 열리며 교외선이 개통됐다. 미군부대 우회 목적으로 사용된 임시역 가릉역이 1963년 8월 20일 폐지되고 의정부역으로 연결되면서 교외선은 20년 만에 비로소 본 모습을 찾게 된다.다만 애초 물자 수송에서 관광으로 목적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교외선이 단순하게 고양~의정부를 이었던 것이 아니라 서울역, 왕십리역과 연계되며 서울의 관광수요를 경기북부로 이전하는 효과를 낳아서였다. 교외선은 서쪽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도는 '서회선'과 동쪽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동회선'으로 움직였다. 서회선은 서울역~능곡역~의정부역~성북역~왕십리역~서울역순으로 운행했고 동회선은 서울역

  • 식민지 수탈의 오랜 상처… 안양 박달동, 다시 '호랑이가 살던 마을'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1)]

    식민지 수탈의 오랜 상처… 안양 박달동, 다시 '호랑이가 살던 마을'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1)] 지면기사

    광복 - 일제 안양~안산 병참기지 잇던 박달교 최적 요지 이유 '도로공사' 일부 건설 추정목조로 지어진후 미군 승계 콘크리트 재건 인근 기지 헬기장 사용… 전술핵 보관 기록도북측 난간 없어 큰 중화기 지나게 개축 흔적'박달2동' 호현동으로 변경 10월까지 투표안양시는 만안구 박달2동 이름을 '호현동'으로 바꾸려 한다. 오는 10월까지 조사에서 주민 다수가 찬성하면 박달2동 명칭은 호현동으로 바뀐다. 호랑이 호(虎)에 고개 현(峴)자를 쓰는 호현은 우리말로 하면 범고개다. 호랑이가 사는 고개에 있는 마을이라 호현동이라고 하는 것이다.박달동에는 모두 12개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개와 가장 가까운 마을은 웃말(上村)이었다. 말 그대로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윗말 주민이 호랑이에게 잡혀 죽자 아래쪽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정착지가 형성됐다. 현재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있는 조선 태종의 아들 후령군 이간의 묘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하니 박달동에 사람이 모여 산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박달동 주민들은 음력 10월 2일에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호랑이에게 잡혀가지 않고 공생하길 바라는 데서 시작한 전통이었을 것이다.웃말 외에도 가장 위쪽에 있는 박달리라고 해서 불린 웃박달리, 부자가 많아 부자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붓골, 안개가 자주 끼어 선녀가 산다해서 붙여진 선녀골(이상 안양시지) 등 박달동 12개 마을이 사라진 건 1930년의 일이다. 안양에서 수원으로 후령군 묘역이 이장된 것도 같은 시기다. 바로 일제 강점기, 일제가 이곳에 병참기지를 만들며 마을이 사라졌다.지금이야 시흥에서 안양, 안양에서 시흥으로 이동하려면 고개를 우회하는 자동차 도로를 이용하면 되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곤두레미 고개'가 유일한 교통로였다고 한다(시흥문화대전). 안양시 박달동과 시흥시 목감동을 잇는 곤두레미고개는 강도가 많아 빨리 곤두박질치듯 지나가야 한대서 곤두레미라고 불렀다는 설과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이 고개에 많아 곤두레미라고 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 건국훈장·돌베개… 애국지사들 '역사의 퍼즐' 찾아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0·광복)]

    건국훈장·돌베개… 애국지사들 '역사의 퍼즐' 찾아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0·광복)] 지면기사

    집터·묘소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만세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 집터·묘소종손 심재만씨가 지켜… 방문한 이들 '가이드"찾는 발길 줄지만 광복절 다시 손님맞이 준비학도병 탈출 6천리 여정·'사상계' 발간 장준하파주시, 통일동산 4천㎡ 터에 기념 공원·조형물아직 개발로 사라지고 방치된 공간들 대다수■ 심상각 선생 집터 뒷산의 묘소'애국지사 심상각 선생의 묘'파주시 광탄면 심상각 선생의 집터 뒷산을 10분여 올라가니 건국훈장 애국장 비석과 팻말이 선생의 묘소를 친절히 알려준다.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팻말과 비석 덕분에 단번에 심상각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1919년 3월, 우산 심상각 선생은 파주 만세운동을 주동한 인물 중 하나다.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봉일천리 장터에 있던 1천여명과 합세해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파주 만세운동은 경기 북부지역 최대 규모였다고 전해진다.격렬한 만세운동 이후 심상각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장관인 박찬익 선생의 협조로 합류한 심상각 선생은 상해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심상각 선생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약 15년만이었다. 심상각 선생은 국내에 돌아와서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파주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역임하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광탄보통학교에 관한 별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설립 및 운영과정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그후 심상각 선생은 자신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을 위한 위령제를 하는 등 애국지사 선양사업에 힘쓰다가 1954년 11월 9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심상각 선생의 집터와 묘소는 선생의 종손인 심재만(82)씨가 지키고 있다. 집터 바로 옆에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심재만씨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찾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심재만씨는 심상각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된 문서와 사진자료 등 그동안 모아

  • 도시개발에 '허물어진 역사(歷史)'… '만세운동 주춧돌' 기억을 세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9)]

    도시개발에 '허물어진 역사(歷史)'… '만세운동 주춧돌' 기억을 세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9)] 지면기사

    광복 - 집터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3·1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집터 소실… 안내판·표창장 남아수원 김세환·이선경 선생도 비슷道, 유적지 실태조사·보존 노력다른 방식이라도 기억할 곳 필요"3월 28일, 파주 군민은 봉일천 장으로!"1919년 3월 28일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대규모 시위는 파주시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꼽힌다.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27일 청석면 만세 운동이 이어져 28일 봉일천 장날 만세운동이 촉발됐다.봉일천 장날 만세 시위대는 봉일천 시장으로 향하면서 3천여명으로 규모가 불어났다. 봉일천 만세운동은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 기관을 공격하면서 가장 격렬한 시위로 기억에 남았다. 만세 시위대는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봉일천 시장으로 행진해 군중과 합세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봉일천 장날 만세 운동의 중심엔 우산 심상각 선생이 있었다. 시위는 심상각 선생이 기획했으며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 19명이 주축이 됐다. 그들의 회의 장소는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58-1번지. 심상각 선생이 살던 집이었다. 심상각 선생의 집에서 시위 주축 19명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시위 시기, 작전 등을 수립하고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파주 주민들에게 전달했다.지난 26일 파주에서 만난 심상각 선생의 손자 심재만(82)씨는 "경찰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만세 시위를 기획했다고 들었다"며 "조부님이 시위를 이끌면서 사람들이 집으로 모여 회의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심재만씨는 봉일천 만세시위가 파주 탄현면, 적성면, 법원읍 등 지역 곳곳의 대표들이 모여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주민들의 대다수인 농민들도 참여해 주축을 이룬 점을 강조했다.심상각 선생은 만세 시위를 벌이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귀국해 파주시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박정희 정부는 심상각 선생에 지난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노태우 정부도 1991년 건국훈장 애국

  • 강제노역의 상처 잊혀도… 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기억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8)]

    강제노역의 상처 잊혀도… 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기억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8)] 지면기사

    일제 경원선 철도노선 일부… 현재 교각·터널만 남아 6·25 당시 탄약고… 폭격 균열로 특이 자연현상 발생유사사례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관광지 변모역사적 의미 되새겨야… 착취 역사 재조명 노력 강조연천군 신서면 경원선 폐철교에서 남쪽 방향으로 200여m. 여기에 연천 폐터널이 있다. 조금만 더 이동하면 강원도 철원이다. 일제 강점기, 서울 용산에서 출발한 경원선은 연천~철원을 거쳐 원산까지 이어졌다.콘크리트 교각만 남은 철교 흔적과 인접한 폐터널은 일제가 기획한 추가 노선의 흔적으로 보인다. 폐터널 서쪽으로 경원선이 지나는데 1912년 경원선 개통 이후 새로 터널을 뚫어 신규 노선을 신설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철도도 사라져 교각과 터널만 남아 있을 뿐이다.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6·25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터널 상판에 균열(7월 2일자 11면)이 생기면서 나타났다. 위에서 아래로 맺히는 게 일반적인 고드름인데 균열 사이로 물이 흐르며 바닥에서 위로 솟는 모양의 역방향 고드름이 형성된 것이다. 길이 100m, 폭 10m의 폐터널이 전쟁 당시 북한군의 탄약고로 활용됐기 때문에 폭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철도용 터널로 만들어졌으나 노선 신설을 앞두고 일제가 패망하며 활용되지 않았고 잠시 탄약고로 쓰였다 폭격 이후엔 관광지가 됐다. 안전사고를 우려해 펜스가 둘러쳐진 지금은 터널 안으로 접근할 수 없다. 터널→탄약고→관광지로 변모하게 된 폐터널의 과거는 기구한 한국 근현대사와 포개진다.비슷한 운명이면서 더 알려진 사례도 있다. 경원선이 개통한 해(1912년)에 일제는 시흥광산 개발을 시작했다. 시흥광산은 황금광산으로 개발됐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수백kg의 황금이 이곳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1972년까지 쓰인 시흥광산은 이후 최근까지 40년 동안 새우젓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동굴의 저온이 저장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탈바꿈한 이곳은 광명동굴이다. 황금광산과 새우젓 보관

  • 침략 도구에서 평화 상징으로… 경원선 연천역 철마는 분단 딛고 통일 향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7)]

    침략 도구에서 평화 상징으로… 경원선 연천역 철마는 분단 딛고 통일 향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7)] 지면기사

    1912년 일제 대륙 침략 목적 이용 개통 수송 크게 기여… 6·25 후 일부만 운행남북정상회담 당시 복원 논의·현재 중단이제는 관광지… 주민들 철도연장 희망■ 수탈을 위해 탄생한 철도, 그리고 경원선경원선 연천역이 문을 연 건 1912년 7월 25일 일이다. 용산과 의정부를 거쳐 연천으로 이어진 경원선은 철원을 넘어 북한 원산까지 연결됐다. 경원선은 서해안과 동해안을 서북으로 횡단해 두만강에서 일본의 서북지방~한반도~만주 동북부 지역을 잇는 간선철도였다. 전구간 222.7㎞로 일본이 대한민국을 강제병합한 직후 착공된 경원선의 목적은 다름 아닌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경원선의 착공과 동시에 일본은 호남선의 착공도 추진했다. 이전에 개통된 경부선(용산~부산), 경의선(용산~신의주)까지 포함해 일본의 'X자' 철도망이 완성됐다. 19세기 말부터 이어오던 일본의 대륙침략 구상의 시작이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철도를 통한 화물 수송량은 1910년 90만3천t에서 1940년 2천562만5천t으로 증가했다. 경원선은 경부선과 경의선의 뒤를 이어 3번째로 많은 화물량인 199만8천여t을 수송했다. 경원선을 이용해 다량의 화물이 서울에서 원산을 통해 일본과 대륙 방면으로 원거리 수송이 이어졌다.일제시기 철도가 운반했던 화물은 식민지 경제의 단면을 반영한다. 1910~1930년대까지 철도에 의한 물자 수송은 농산품이 압도적이었고 공산품도 2배 이상 증가했다. 대전을 중심으로 연결된 경부선과 호남선은 전라도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또한 경부선과 경원선 등을 활용해 일본과 만주를 빠르게 연결해 병참노선화했다.수탈의 창구로 사용된 경부선과 호남선은 현재 주요 교통로가 됐고, 경의선과 경원선 일부는 전철로 시민의 발이 됐다.■ 분단의 아픔이 평화의 상징으로경원선 연천역은 위도 상 38도 위에 있어 6·25 전쟁 이전에 소련군정과 북한에 속해 있었다. 연천역이 있는 연천읍 차탄리는 일제강점기와 북한 점령기에 연천군 전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지만 전쟁 후 연천군 대부분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