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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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손으로 지켜낸 '자유'… 전쟁은 아직 '진행형' 지면기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5·끝)] 잊지 말아야 하는 '아픔의 기억' 1129일의 처절했던 사투… 남북한 300만명 사망·실종'정전 70주년' 올 1월부터 지역언론 9곳 '기억의 여정' 포화 속으로 뛰어든 수많은 젊은이들 발자취 되새겨무고한 민간인 학살, 정확한 진실 규명 아직까지 미궁비극 반복 안되려면 '기념 사업' 민간차원 동참해야선열들이 지켜낸 역사, '다음 세대로 연결' 준비해야'총력전(總力戰)'.군대를 넘어 국가가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싸우는 전쟁을 뜻한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일컫는다. 총력전은 군대끼리 맞붙어 누가 더 많이 살아 남는가 등의 결과로 승패를 갈랐던 역사속의 전쟁과 달리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군인뿐만 아닌 참여하지 않는 민간인에까지 미치게 되며, 과거를 지나 현재까지도 겪게 하기도 한다. 70여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은 이 같은 총력전의 참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중단된 한국전쟁은 1천129일동안 남북한을 통틀어 약 300만명의 사망 또는 실종자를 냈다.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3천만명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10명 중 1명이 전사한 것으로 사실상 모든 한국인이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척을 잃는 참담한 경험을 한 셈이다.한국전쟁은 전선의 전후방을 따지지 않았다. 국군과 인민군 모두 자신의 점령지역에 있는 민간인에게 '반동분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된 민간인만 약 99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 같은 총력전을 펼쳤던 제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등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은 수치로,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차가운 땅속 산하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처럼 총성이 멈춘 지 70년이 지났지만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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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수호에 한마음 '그때처럼'… 역사보존에 합심을 '다시한번' 지면기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4)] 평화문화공간 필요한 '춘천대첩' 1978년 의암호 인근 '전적기념관' 조성… 1981년 강원도 양여"2차원 전시물 위주" 콘텐츠 부족 지적… '건립추진위' 구성지난 6월 범시민대회… "자긍심 느낄 공간 새롭게 만들어야"민간 중심 움직임 활발한데 수백억 예산탓 지자체는 소극적'북한이 대패를 인정한 유일한 전투' '병력 열세를 딛고 대한민국을 지킨 3일간의 방어전' '군인·시민·학생이 합심해 거둔 승리'6·25 전쟁 발발 초기 벌어진 춘천지구 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들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7일까지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전투는 '춘천대첩'으로 불린다. 하지만 춘천대첩을 기념하는 공간은 춘천에 초라하게 남아있다. 의암호 인근에 1978년 조성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이다.기념관 입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도순시 시 국가안보의식, 향토방위의식 고취를 위해 설립을 지시했고 친필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의 명판으로 써 주심으로 동년 11월 28일 설립되었다"고 쓰여있다. 강원특별자치도(이하 강원자치도)가 1981년 교통부로부터 이 건물을 무상 양여 받았고, 한국자유총연맹이 위탁 운영 중이다. 강원자치도가 지원하는 연간 예산은 관리인 인건비, 공과금, 소규모 수리비로 1억여원 정도. 이 곳에서 열리는 춘천대첩 기념행사도 없어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열악하다.2019년 연간 방문객은 13만3천805명이었지만, 코로나19가 유행했던 시기에 급감해 지난해에는 6만9천369명이었고 올 상반기에는 1만7천260명에 그쳤다. 춘천대첩에 학도병으로 참전했거나, 춘천대첩의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 알리길 열망하는 지역 원로들은 '춘천대첩 평화문화 기념관' 건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올해 정전 70주년을 맞아 시작된 일이다.■ '민·관·군 합심의 역사' 후대에 전해야=지난달 28일,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에서 만난 진성균(90) 6·25참전유공자회 강원도지부장.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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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3)] '대전전투'의 영웅들, 기억해야 할 희생 지면기사
이승만 대통령, 6월27일 대전역 도착… 당시 충남도청 '정부청사' 역할 '동요하지 말고 생업 충실하라' 서울에 있는것처럼 녹음 방송에 큰 피해'대전협정' 통해 북한군 진격 일주일 저지…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도움기관사·철도원들, 수송작전·전투 등 투입… 美 딘 소장 구출에도 헌신'순직' 김재현 기관사,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안장·특별 훈장전국 최대규모 '보훈테마파크' 조성 추진… 용역 거쳐 2029년 준공 목표철도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던 대전은 교통과 물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6·25 전쟁 시 대전은 국토의 중심이면서 교통·물류 중심이었던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이승만 정권은 수도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라 대전에 도착, 임시수도로 공표하기도 했다. 옛 충남도청(등록문화재18호)을 임시정부로 사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충실하라'는 취지의 방송 녹음을 대전에서 했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일이다. 이 방송을 믿고 피란을 주저한 서울시민들이 북한군의 점령 아래 희생이 컸던 역사적 아픔도 있다.피해는 컸지만 국군과 미군이 결사항전으로 막은 '대전전투'는 북한군의 남하 진격을 일정 시간 저지, 낙동강 전선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소중한 시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당시 미군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철도기관사들의 활약 등 대전은 6·25 전쟁의 많은 사연을 간직한 도시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전과 임시정부 충남도청=1932년 지어진 옛 충남도청. 6·25 전쟁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각료들은 27일 새벽 2시 서울 경무대를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이 대통령을 태운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4시 무렵, 이렇게 늦어진 데는 열차가 대구에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이영진 당시 충남도지사가 머물던 대흥동 관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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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2)] '피란수도 부산' 유네스코 등재 추진 지면기사
참혹했던 한국전쟁을 극복하고, 국제 지원의 수혜를 입던 국가에서 원조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 그 중심에서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포용하고,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다졌던 부산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세기 냉전시대의 피란수도에서 21세기 평화도시로 변신을 꿈꾸는 부산이 지켜야 할 유산은 무엇일까.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를 추진 중인 지금, 되새겨 봐야 할 정전 70년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짚어본다.5월 국내 최초 '근대유산 분야' 잠정목록 올라가… 2028년 최종 목표경무대·임시중앙청·유엔 묘지·우암동 소막 주거지 등 9곳 '연속 구성'보완 연구·시민들 지속적 관심 필요… 지자체·주민 반대 등 해결 과제삼성·LG 등 대기업 성장 발판 역할… '위기 극복' 콘텐츠 후대 알려야"수십만 피란민 품어준 당시 이야기, 높은 인문학·산업적 가치 보유" ■ 세계유산 등재 어디까지 왔나='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지난 5월 16일 국내 최초로 근대유산 분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된 바 있다. 지난달 17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홈페이지의 잠정목록에 게재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 온 부산시는 최종 등재 목표 시기를 2028년으로 잡고 있다.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세기 냉전기 최초 전쟁인 한국전쟁기의 급박한 상황 속에 1천23일 동안 임시수도 기능을 유지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물이다. 피란수도의 정부 유지, 피란 생활, 국제협력의 기능을 하는 9개 연속 유산으로 구성된다. 먼저 서구에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3곳이 있다. 중구에도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3곳이 있다. 남구에 유엔묘지와 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 2곳이 있고, 부산진구에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가 있다.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등재를 위해서는 거쳐야 할 절차가 남아 있다. 앞으로 문화재청의 우선등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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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1)] 낙동강 방어전투의 의미와 기념사업 지면기사
6·25전쟁 당시 가장 격전지로 꼽히는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의 전세를 뒤집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킨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전투 가운데 가장 핵심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투다. 다부동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됭(Verdun)전투에 비유된다. 경상북도와 칠곡군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였던 다부동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들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美8군 워커 사령관, 북한군 공격에 천연장애물 이용한 최후 방어선 구축전쟁 조기 종결하려던 北 의도에 '타격'… 한미연합작전능력 향상의 초석다부동 전적기념관 일대 '韓 호국벨트' 넘어 '세계 프리덤벨트'로 성역화전투 당시 총탄 뚫고 탄약·연료·식량 보급한 '지게 부대원' 위령비도경북도 '메모리얼 파크' 계획… 참전국 인사들 필수 방문코스 역할을백선엽 장군 동상 건립이후 관람객 지속 증가… "국가적 관심 필요"■ 낙동강 방어선전투의 의미"한 발짝이라도 더 밀리면 끝장이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6·25 전쟁 당시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영웅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말이다.북한의 공세에 밀리던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해 사수하기로 했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 즉 '낙동강 방어선'이라고 부른다.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해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했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지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투로 평가된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이 됐다.낙동강 방어선전투는 대구방어전투·영천(永川)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됐지만, 이 가운데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가 가장 핵심이다.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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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0)] 인천상륙작전을 둘러싼 상반된 시선 지면기사
인천시와 해군이 지난달 15일 인천 앞바다에서 개최한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는 해마다 열린 역대 행사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이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식에 참석하고, 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주관했다. 1960년부터 열린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전승 기념식에서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 공산화를 막은 역사적 작전이자 세계 전사(戰史)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였다"며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기반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압도적 대응 역량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는 인천상륙작전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전 역사로 격상시킨 것이다. 인천시는 2억원 내외였던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예산을 올해 국비·시비 포함 27억3천만원으로 확대했다. 올해 인천시는 대대적인 인천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포함해 지역 곳곳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문화 행사와 국제학술대회 등을 열었다. 인천시는 내년부터 행사를 더욱 확대해 2025년 제75주년 행사부터는 한국전쟁 참전 8개국(한국·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호주·뉴질랜드·네덜란드) 정상급 인사가 참석하는 국제행사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인천시는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의 주제를 '세계평화도시'로 설정했다. 인천상륙작전이 국내외에서 더욱더 조명받을 여건이 조성됐다.73주년 기념행사 尹대통령 첫 참석… 기존 2억 내외 예산 올해 27억으로 증액市, 내년부터 참전국 정상급 인사 참여로 확대 계획… "대첩으로 격상" 의견도상륙 직전 폭격에 주민 최소 100여명 희생… 곳곳 민간인 학살 등 '공포의 기억'원주민 이주 이후 귀향 대책 전무… 2021년 월미공원에 위령비 건립·헌화 마련 인천상륙작전을 조명하는 빛의 세기가 강할수록 그 뒤로 드리우는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올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전승 기념 강화' '대통령 중심'으로 흐르면서 '인천 지역·민간인 피해'처럼 전쟁의 비극을 상기하는 주제들은 과거 행사보다 더 소외됐다.정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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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9)] 기념관 건립 필요한 '마산방어전투' 지면기사
기념(記念).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전쟁기념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과 자유민주주의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잊는다면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마산방어전투는 지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마산 일대에서 한미동맹군과 인민군간 벌인 전투다. 이 기간 핵심 격전지였던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뒤바뀌었고 인민군 4천여명과 미군 1천여명이 희생됐을 정도로 큰 규모의 전투였다. 하지만, 미군 주도 전투라는 이유 등으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혀 가고 있다.이러한 현실 속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여러 선양사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시민들과 지역사회에서 마산방어전투가 알려졌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기념관 설립의 필요성 또한 커지고 있어 주목을 모으고 있다.1950년 8월1일~9월14일 '대혈전''최초' 한미연합 작전 전개 주장도육사 발간 '60대 전투' 기록 전무기념사업회 창립 다양한 선양활동내달중 용역… 부지 선정 등 논의 ■ 최초 한미연합 작전=1950년 8월 1일 북한군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검문소에 집결했다.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천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확보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천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아군의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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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8)] 남북 민족분열 비극 표출의 상징 '빨치산' 지면기사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발발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사살된 빨치산은 6천921명에 달하고 603명이 생포됐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천287명에 달한다.퇴각하지 못하고 지리산 입산한 북한군군·경 보급로 차단-식량 약탈 등 일삼아남한 좌익과 조직, 저항하다 6921명 사살진압과정 국군·경찰 등 7287명 목숨 잃어'부역자 혐의' 사살된 민간인 피해도 심각 ■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 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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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7)] '반공 vs친공' 계속된 대립, 제주 포로수용소 지면기사
2만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왜 왔을까?3년1개월(1천129일) 동안 벌어진 6·25전쟁에서 중공군 포로는 약 2만1천700명으로, 미군 4천439명보다 5배나 많았다. 전쟁이 한창일 당시 포로수용소는 육지와 떨어진 섬인 제주도가 후보지였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자, 제주도의 포로수용소 설치는 유력해졌다. 다만,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제주도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된 점, 이 섬은 임시정부가 들어설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육지와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물 공급이 가능한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로 낙점됐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생포되거나 항복한 포로 송환은 쟁점이 됐다. 포로수용소는 냉전과 이념 대결의 축소판으로 또 다른 전쟁터였다.유엔군, 폭동·유혈사태 계속돼 분리 작전'반공' 모슬포·'친공' 제주비행장에 수용'중공 수립 3주년' 시위 발생… 45명 사망성당 건립 공사 투입시키며 교화 노력도정전협정 체결이후 각각 대만·중국 송환 2만명에 달했던 중공군 포로들은 반공(反共)과 친공(親共)으로 대립했고, 서로를 죽이고 학대하는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폭동과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자,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2월 '분리 작전'에 돌입했다. 그해 7월까지 약 2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포로를 거제도에서 제주도로 보냈다.당시 중화민국(대만)으로 가길 원했던 반공포로 1만4천여 명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지역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송환을 원했던 친공포로 5천900여 명은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수용됐다. 친공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주년을 맞아 시위를 벌였다. 미군 2개 소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은 부상을 당했다.유엔군사령부는 "폭동(시위)은 집단 탈주를 위해 시작됐으며, 포로들은 탈옥 후 한라산 빨치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이 사건 이후 경비를 맡은 미군과 친공포로의 갈등은 심화됐으며, 포로수용소 주변에 살았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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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6)]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下) 지면기사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은 명실상부한 정치, 외교,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정치>■ 격동기 정치 중심에…중공군 개입후 모든 정부기관 내려와이승만 장기집권 기틀 '부산정치파동''중석불' 불하 업자 폭리… 정치자금화건국후 최초 정경유착 사건 꼽히기도한국전쟁기 부산이 처음 임시수도가 된 시기는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6일까지다. 서울 수복 후엔 부산에 있던 정부 기관도 환도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1년 1월 3일 정부는 모든 정부 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부산 서구 부민동에 있는 경남도청사(현재 동아대 석당박물관)가 임시 중앙청이 된다. 경남도지사 관사(현재 임시수도기념관)는 대통령 관저로 활용된다. 국회는 중구 부산극장에 있다가 이후 경남도청 체육관인 상무관을 사용한다. 1940년대에 지어진 남포동 소화장아파트는 국회의원 관사가 됐다. 미국대사관은 부산 미문화원에 자리를 잡는 등 각국 외교 기관도 부산으로 옮겨온다. 체신부는 부산우체국을 사용하고, 부산시청사는 사회부와 문교부 등이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대체로 중구에 자리를 잡은 다른 정부 부처와 달리 교통부는 부산진구 범천동에 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부산시민들이 범곡교차로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는 이유다.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장기 집권을 위한 첫 번째 개헌이 이뤄진 곳도 부산이었다.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1952년 5월 26일 오전 동래구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중구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운다. 이 버스는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 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총 든 헌병의 검문을 받는다. 전날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을 이유로 검문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