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20일 밤. 모 지방경찰청 112 지령실에 "남편이 술에 취해 가족을 죽인다고 위협하고 있다. 집안에 큰딸이 있는데 문을 안 열어준다"는 다급한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경찰은 신고를 '코드1'(긴급)으로 접수해 1분 만에 출동을 지시했다. 하지만 관할 지구대 순찰차는 "가게 앞에 차량이 주차돼 오토바이를 들이지 못한다"는 비긴급 신고를 처리 중이었다. 같은 지구대의 다른 순찰차도 다른 현장에 나가 있었다.

결국 인근 지구대 순찰차가 지원 출동해 신고 접수 후 9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심각한 상황까지 가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집안에서 흉기를 들고 큰딸을 위협해 경찰특공대까지 출동하던 중이었다.

긴급성이 떨어지는 112 신고 처리에 시간을 쓰다 정작 급박한 상황에 제때 현장에 도착하지 못한 실제 사례다.

경찰청은 이런 폐단을 줄이고 긴급 신고 초기 대응에 경찰력을 집중하고자 112 신고 대응 단계를 종전 3단계에서 5단계로 세분화한다고 31일 밝혔다.

경찰은 종전까지 긴급도에 따라 코드1(긴급), 코드2(비긴급), 코드3(비출동)으로 분류하던 112 신고 대응 단계를 코드 0∼4로 나눴다.

코드0은 여성이 비명을 지르고 신고가 끊기는 등 강력범죄 현행범으로 의심되는 경우, 코드1은 모르는 사람이 현관문을 열려고 한다는 등 생명·신체에 위험이 임박하거나 발생한 경우에 해당한다. '최단시간 내 출동'이 목표다.

코드2는 영업이 끝났는데 손님이 깨워도 일어나지 않거나 집에 들어와 보니 도둑이 든 것 같다는 등 생명·신체에 잠재적 위험이 있거나 범죄 예방 필요성이 있는 경우로, 코드 0∼1 처리에 지장 없는 범위에서 가능한 한 신속 출동한다.

코드3은 '며칠 전 폭행을 당해 치료 중이다'라는 등 즉각 현장 조치는 필요하지 않으나 수사나 상담이 필요한 경우로, 당일 근무시간 중 처리가 원칙이다.

이밖에 종전에 코드3으로 분류된 민원·상담 신고사건은 코드4로 지정하고 신고를 받으면 출동 없이 관련 기관에 인계하기로 했다. 다만 비긴급 상황이 긴급으로 변했다고 간주할 신고가 들어오면 즉각 출동한다.

경찰은 2009년 긴급도에 따라 3단계 112 신고 대응체계를 갖췄다. 그러나 긴급-비긴급 간 신고 접수부터 현장 도착까지 소요시간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자 대응체계 세분화를 추진해 왔다.

경찰에 따르면 작년 112 신고 건수 1천910만여건 가운데 856만여건(44.9%)은 긴급성이 떨어지는 사건이었고, 838만여건(43.9%)은 출동이 필요 없는 상담·민원성 신고에 몰린 것으로 나타났다.

한정된 인력과 장비로 신고 사건에 대응하다 보니 긴급도가 높은 우선 출동 사건 현장에 제때 도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외국 사례를 보면 미국 휴스턴 경찰국의 경우 긴급성에 따라 신고를 10단계로 구분하고, 영국 수도경찰청은 비긴급 신고는 최장 48시간까지 출동 시한을 뒀다.

경찰 관계자는 "112 신고 대응체계가 정착하려면 성숙한 신고문화 확산과 국민 협조가 필요하다"며 "비긴급 신고로 분류돼 출동이 다소 늦더라도 긴급 신고를 우선 처리하고자 부득이한 조치임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