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關東·관동) 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의 참혹성이 일본 도쿄도위령당에서 발견된 사망자 기록 속 제주 출신 일가족의 사연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기록에는 단순히 사망자의 이름과 본적, 생년월일 등이 들어 있을 뿐이지만 이들의 인적사항이 당시 일본 군부에 의해 희생된 '가메이도 학살 사건'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과 일치해 증언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명부에 포함된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의 조묘송(趙卯松·1891∼1923·당시 32세)씨 가족의 사연은 이렇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께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를 비롯한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했다.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부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한다'는 괴소문이 도쿄 전역에 나돌기 시작했고 일본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일본 군중은 '조센진 고로세!'(조선인을 죽여라!)라 외치고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을 일일이 검사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본 군대와 경찰, 각지에서 만들어진 '자경단'이란 자위집단 등이 죽창과 쇠갈퀴, 곡괭이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나돈 데다 4년 전 일어난 3·1 독립운동 여파가 일본에도 미칠 것을 우려해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조선인들을 곳곳에서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당시 도쿄 고토(江東)구 가메이도(龜戶) 경찰서에 9월 2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300여명의 조선인들이 격리 수용돼 있었는데 일본 내 사회주의자 척결에 나섰던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들이닥쳤다.
그날 오후 1시께부터 한 장교의 지휘 아래 군인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와 조선인을 세 사람씩 불러내 연무장 입구에서 총살하기 시작했다.
가메이도 지역의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척결하면서 이들과의 결탁 등을 우려, 평소 감시를 강화했던 조선인 학살에 나선 것이다.
지휘자는 총소리가 들리면 인근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될 터이니 총 대신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 뒤부터는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나머지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이때 임신한 여성도 한 사람 있었는데 일본군이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배 가운데서 어린 아기가 나왔다. 일본 군인들은 갓난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그 어린 아기까지 찔러죽였다.
시신들은 다음 날 새벽 2시 화물자동차에 실려 어디론 가로 옮겨졌다.
이런 사실은 당시 일본 유학 중에 '재일본 한국기독교청년회' 이사로 관동 조선인 학살 희생자 실태를 조사했던 '재일본 관동지방이재(罹災)동포 위문반' 일원 최승만(崔承萬)씨가 남긴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 시민단체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씨에 따르면 최씨가 활동한 '이재동포 위문반'은 당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조선인 동포 등을 상대로 실태를 은밀히 조사했다.
1923년 12월 5일자 상하이(上海) 독립신문에 실린 총 조선인 희생자 숫자 '6천661명'과 일본 각지의 희생자 숫자들은 이 위문반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사건 당시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조선어 통역으로 일했던 나환산(羅丸山·조선인 추정)의 목격담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은 1970년 일본에서 발행된 코리아평론이라는 잡지 등에 게재됐다.
지난 2014년 1월 21일 이 증언에 일치하는 희생자들의 신원과 유족이 확인됐다.
연합뉴스가 '가메이도 학살 사건'의 목격 증언 기록 등을 토대로 당시 학살된 희생자들을 추적한 결과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의 조묘송(趙卯松·1891∼1923·당시 32세)과 그의 동생 조정소(趙正昭·1900∼1923·23세)·조정화(趙正化·1904∼1923·19세), 아내 문무연(文戊連·1885∼1923·38세), 아들 조태석(趙泰錫·1919∼1923·4세) 등 일가족 5명이 이 증언대로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몰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만삭의 상태에서 학살당한 부인은 바로 조묘송의 아내 문씨로 밝혀졌다.
이어 이번에 도쿄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 도쿄도위령당의 납골당 창고에서 1924년부터 일본 도쿄시 진재구호사무국이 신고를 받아 작성한 피해자 기록 카드인 도쿄도위령협회 보관 '지진재앙 임시사망자명부'(震災假靈名簿 震災死亡者調査表·진재가령명부 진재사망자조사표)에 조씨 가족 기록이 포함된 사실이 새로 밝혀지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의 니시자키씨와 조선인 대학살을 주제로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재일동포 오충공(吳充功) 감독은 조선인 대학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한편 조씨 유족의 위령당 방문과 기록 열람을 추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록에는 단순히 사망자의 이름과 본적, 생년월일 등이 들어 있을 뿐이지만 이들의 인적사항이 당시 일본 군부에 의해 희생된 '가메이도 학살 사건'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과 일치해 증언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명부에 포함된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의 조묘송(趙卯松·1891∼1923·당시 32세)씨 가족의 사연은 이렇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께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를 비롯한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했다.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부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한다'는 괴소문이 도쿄 전역에 나돌기 시작했고 일본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일본 군중은 '조센진 고로세!'(조선인을 죽여라!)라 외치고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을 일일이 검사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본 군대와 경찰, 각지에서 만들어진 '자경단'이란 자위집단 등이 죽창과 쇠갈퀴, 곡괭이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나돈 데다 4년 전 일어난 3·1 독립운동 여파가 일본에도 미칠 것을 우려해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조선인들을 곳곳에서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당시 도쿄 고토(江東)구 가메이도(龜戶) 경찰서에 9월 2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300여명의 조선인들이 격리 수용돼 있었는데 일본 내 사회주의자 척결에 나섰던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들이닥쳤다.
그날 오후 1시께부터 한 장교의 지휘 아래 군인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와 조선인을 세 사람씩 불러내 연무장 입구에서 총살하기 시작했다.
가메이도 지역의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척결하면서 이들과의 결탁 등을 우려, 평소 감시를 강화했던 조선인 학살에 나선 것이다.
지휘자는 총소리가 들리면 인근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될 터이니 총 대신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 뒤부터는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나머지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이때 임신한 여성도 한 사람 있었는데 일본군이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배 가운데서 어린 아기가 나왔다. 일본 군인들은 갓난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그 어린 아기까지 찔러죽였다.
시신들은 다음 날 새벽 2시 화물자동차에 실려 어디론 가로 옮겨졌다.
이런 사실은 당시 일본 유학 중에 '재일본 한국기독교청년회' 이사로 관동 조선인 학살 희생자 실태를 조사했던 '재일본 관동지방이재(罹災)동포 위문반' 일원 최승만(崔承萬)씨가 남긴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 시민단체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씨에 따르면 최씨가 활동한 '이재동포 위문반'은 당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조선인 동포 등을 상대로 실태를 은밀히 조사했다.
1923년 12월 5일자 상하이(上海) 독립신문에 실린 총 조선인 희생자 숫자 '6천661명'과 일본 각지의 희생자 숫자들은 이 위문반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사건 당시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조선어 통역으로 일했던 나환산(羅丸山·조선인 추정)의 목격담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은 1970년 일본에서 발행된 코리아평론이라는 잡지 등에 게재됐다.
지난 2014년 1월 21일 이 증언에 일치하는 희생자들의 신원과 유족이 확인됐다.
연합뉴스가 '가메이도 학살 사건'의 목격 증언 기록 등을 토대로 당시 학살된 희생자들을 추적한 결과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의 조묘송(趙卯松·1891∼1923·당시 32세)과 그의 동생 조정소(趙正昭·1900∼1923·23세)·조정화(趙正化·1904∼1923·19세), 아내 문무연(文戊連·1885∼1923·38세), 아들 조태석(趙泰錫·1919∼1923·4세) 등 일가족 5명이 이 증언대로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몰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만삭의 상태에서 학살당한 부인은 바로 조묘송의 아내 문씨로 밝혀졌다.
이어 이번에 도쿄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 도쿄도위령당의 납골당 창고에서 1924년부터 일본 도쿄시 진재구호사무국이 신고를 받아 작성한 피해자 기록 카드인 도쿄도위령협회 보관 '지진재앙 임시사망자명부'(震災假靈名簿 震災死亡者調査表·진재가령명부 진재사망자조사표)에 조씨 가족 기록이 포함된 사실이 새로 밝혀지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의 니시자키씨와 조선인 대학살을 주제로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재일동포 오충공(吳充功) 감독은 조선인 대학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한편 조씨 유족의 위령당 방문과 기록 열람을 추진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