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분양·테마파크 건설하겠다는 '(주)부영'
개발이익 인천에 어떻게 돌려줄지 '훗날 기억' 궁금
강화도 월곶에 연미정이라는 유서 깊은 정자가 있다.

유군성(1880~1947)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강화에서 인천으로 이주했으며, 여러 장사를 하다가 제재소와 정미소를 운영했다. '유군성 정미소'는 당시 한국인이 운영하던 전국 27곳의 정미소 가운데 가장 많은 자본금을 보유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조선 최고 납세자'로까지 불린 유군성은 다른 부자들과는 달리 돈을 쓰는 쪽에서도 이름을 얻었다. 동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의 설립을 위해 많은 돈을 내놓는 등 수많은 자선으로 명망을 누렸다. 무너져 내린 연미정을 깔끔하게 다시 짓는 데에도 아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군성이란 이름 석 자는 연미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름답게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인천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남은 유군성과 달리 잠시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가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반복창 같은 이도 있다. 반복창은 개항장 인천에서 투기의 상징인 미두(米豆)로 떼돈을 벌었다. 그는 돈을 좇을 줄만 알았지 어떻게 돈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했다. 인천의 대표적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였던 고일(1903~1975)은 '인천석금'에서 '반복창은 돈 때문에 저주했고 돈 때문에 예찬했고 돈 때문에 파란 40년을 고별했으니 그가 남긴 게 무엇이냐'고 힐난했다.
부를 쌓는 사람들은 그 돈을 계속해서 지키기를 원한다. 대대손손으로 번영이 유지될 것을 바란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남는 것은 이름이다. 고일이 갈파한 반복창의 졸렬한 치부로 남을 것인지 유군성처럼 명망 높은 자선가로 남을 것인지는 부자들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 인천은 역사적으로 돈이 떠다니는 곳이었다. 그 돈을 서로 잡으려는 아귀다툼도 유난했다. 강화와 교동, 제물포는 그런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신도시 개발 사업이 몰려 있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인천에는 부자도 많고, 인천에서 부를 이룬 뒤 터를 옮겨 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유군성과 같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전해질 부자가 그리 많지 않은 듯하여 언짢기 그지없다.
23일 인천 연수구에 대규모 테마파크를 건설하겠다는 (주)부영이 인천시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한다. 아파트 분양 사업과 테마파크 사업이 맞물린 구조다. 사업 승인 여부는 개발 이익을 얼마나 어떻게 인천에 돌려줄 것인지가 쟁점이 될 것이다. 먼 훗날 부영이 인천에서 어떻게 기억될지 벌써 궁금하다. 돈을 번 사람이건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꼭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게 있다. 이름난 부자에게는 다 그에 걸맞은 자격이 있다는 점이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