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미국, 일본 등 해외 출장길에 나선 지 약 한 달만인 지난 3일 귀국하면서,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달 10일 본사와 주요 계열사에 대한 검찰의 대대적 압수수색 당시 받은 '충격'에서 다소 회복하는 듯하던 그룹 임직원들도 돌아온 신 회장이 조만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될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 3주간 롯데 실무진 줄소환…사장급·오너가 소환 임박
신동빈 회장은 4일 오전 8시 43분 승용차를 타고 서울 소공동 롯데 본사 지상 주차장에 도착해 건물 26층 집무실로 향했다.
시종일관 굳은 표정의 신 회장은 "오늘 일정은 무엇이냐" 등 취재진의 통상적인 질문에도 일절 입을 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롯데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 회장은 이날 온종일 집무실에 머물 예정이다. 외부 인사 접견이나 행사 등 대외 활동 일정은 하나도 없이 계속 집무실에서 홀로 결재 등 업무를 챙긴다는 게 롯데의 설명이다. 특별한 사내 회의 주재 계획도 없다.
현재 본인뿐 아니라 당장 정책본부 이인원 정책본부장(부회장), 소진세 대외협력단장(사장), 황각규 운영실장(사장) 등 그룹 핵심 수뇌부에 대한 검찰 소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만큼, 검찰이 제기한 의혹들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과 대응논리 구상 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룹 본사격인 정책본부만 따져도, 이미 최근 2~3주 사이 지원실(재무·법무팀 등)과 운영실(계열사 업무 조율) 소속 팀장급 실무진들이 여러 차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봉철 정책본부 지원실장(부사장), 정책본부 비서실 소속 이일민 전무(현 신격호 총괄회장 비서), 류제돈 전무(현 신동빈 회장 비서), 채정병 롯데카드 사장(전 정책본부 근무) 등 그룹과 오너 일가 자금 운용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고위급 인사들도 이미 한 차례 이상씩 소환됐다.
따라서 실무진 조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사장급 이상 최고위급 인사들과 신동빈 회장·신격호 총괄회장 등 오너가에 대한 본격 소환 조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일 그 '신호탄'으로 롯데면세점과 롯데백화점 입점 과정 로비 의혹을 받는 신 회장의 누나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돼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 신동빈 소환될 듯…비자금·일감몰아주기 등 해명해야
롯데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검찰이 주로 소환자들을 대상으로 캐고 있는 그룹 관련 주요 의혹들은 신격호 총괄회장 개인 금고 속 현금 30억여원과 현금출납부 출처, 신격호·신동빈 연 300억원 계열사 자금 수입, 롯데케미칼의 일본롯데물산 끼워넣기 수입, 호텔롯데 롯데제주·부여리조트 헐값 흡수합병, 중국 사업 확장과 손실 과정 비자금 조성 의혹, 롯데홈쇼핑 재승인 과정 로비 가능성 등이다.
아울러 검찰은 자동출납기(ATM) 제조·공급업체 롯데피에스넷을 살리기 위해 롯데그룹 차원에서 무리하게 유상증자를 추진하고 코리아세븐, 롯데닷컴, 롯데정보통신 등 계열사가 동원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 같은 의혹들의 성격으로 미뤄, 롯데 내부에서도 일단 신동빈 회장이 적어도 한 두 차례 검찰에 출두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신 회장은 2004년 롯데그룹 정책본부장 부회장 자리에 오른 시점부터 한국 롯데의 사업을 주도했고, 지난해 7월에는 한·일 롯데 지주회사 격인 롯데홀딩스의 대표이사로 선임되면서 한·일 롯데 경영권을 모두 장악했다. 따라서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가 있다면, 최종 결정권자로서 신 회장의 진술을 듣지 않고는 수사가 진척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 신 회장은 신격호 총괄회장과 해마다 계열사로부터 각각 200억원, 100억원씩 받은 사실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롯데그룹은 이 돈에 대해 "급여와 배당 수령액"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검찰이 두 오너 부자에게 이 부분을 직접 확인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이일민 전무(전 총괄회장 비서실장) 처제 집에서 발견된 통장과 금전출납부, 현금 30억여원 등 신격호 총괄회장 개인 금고 물품의 용도와 출처를 검찰이 신동빈 회장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일민·류제돈 전무 등 이른바 오너가의 '금고지기'로 알려진 정책본부 비서실 소속 임원들이 신격호 총괄회장 뿐 아니라 신 회장의 비서도 번갈아 맡았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의 일본롯데물산을 통한 원료 수입, 롯데피에스넷 유상증자에 대한 롯데계열사 참여, 무리한 중국 사업 확장 등도 그룹 본사 차원의 결정이라면 신 회장은 계열사와 그룹의 이익에 반하는 '배임' 혐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만큼, 검찰에서 직접 무고함을 입증해야하는 상황이다.
롯데 관계자는 "예를 들어 피에스넷 건의 경우, 이미 여러 번 공정위로부터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 데다 피에스넷의 ATM기가 편의점 점주들의 송금까지 가능할 만큼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살리고자 했던 것"이라며 "신 회장이 만약 소환되더라도 충분히 여러 의혹을 소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