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새 외교질서 짜느라 숨가쁜데 우리만 허우적
무능·참혹 절절했던 1950년 연말과 별반 차이없어

벌써 두 달째 주말 저녁마다 서울 광화문과 청와대 일대는 촛불에 뒤덮인다. 전국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하야 요구로 들끓는다. 그 목소리에 국회는 탄핵안 통과로 응답해야만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 본인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이라고 억울해 한다. 박 대통령 옹호세력도 나름대로 힘을 모으고는 있지만 들불처럼 타오르는 촛불의 위세를 어쩌지는 못하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의 컨트롤 타워인 청와대는 이미 국민들에게 코미디 극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정작 박 대통령은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다. 그 사이에서 자칫 대한민국이 결딴나게 생겼다.
지금의 시국을 병자호란이나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던 그 난리 통에 비유하는 것은 그만큼 목하의 사태가 엄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개월 뒤면 러시아와의 밀월 시대를 진작부터 예고해 왔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미·일·러 3국이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국제 이슈에 공동보조를 취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중국은 그만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세계 각국은 새로운 외교질서를 짜느라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정말 난리 통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만 '대통령 문제'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
전쟁 중이던 1950년 연말의 하 수상함은 어느 정도였을까. 해방이 되자마자 우리에게 읽기 쉬운 '조선역사'부터 펴냈던 사학자 김성칠 서울대 교수의 일기에 나타난 그 모습은 지금 다시 눈에 넣기가 여간 아픈 게 아니다. 정권의 무능함과 야비함, 피란의 참혹함이 절절하다. UN군 주둔 문제를 얘기하는 대목도 있는데 이는 오늘의 사드(THAAD) 배치 문제와 겹쳐지는 듯하여 짠하기만 하다. 1950년 12월 15일자를 보자. '미 대통령 트루먼이 UN군은 여하한 사태에 당면하여도 절대로 한국에서 철퇴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하여 모두들 얼마쯤 안도의 빛을 보인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서 마침내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결과는 외국 군대가 언제까지나 있어주어야만 마음이 놓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몰골에 술이라도 억백으로 퍼마시고 얼음구멍에 목을 처박아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이다.'
그때와는 벌써 70년 가까이나 흘렀건만 이 나라의 몰골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제 몸 하나 밝히는 데만 혈안이다. 겉으로는 너나없이 국가와 민족을 운운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말뿐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음독 자결한 매천 황현(1855~1910)은 그랬다. '나는 국가와 백성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재난이나 변란이 우연히 발생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