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때 산 법률서적 뒤적이다 10만원권 수표 발견
기한 지나 못 쓴다면 누구에게 조력 구하나 걱정

앞으로는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검·경의 수사나 법원의 재판이 호락호락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몸이 피곤하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 수사에 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고, 헌재가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팁까지 받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나는 모른다'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이면 웬만한 조사는 통과 가능한 '전가의 보도'처럼 쓸 수 있다는 점도 각인시켰다. 앞으로는 '최순실은 되고 나는 왜 안 되느냐'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수사 대상자들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검·경만 골치 아프게 생겼다. '최 선생님과 그들의 법률 강의'가 생각보다 더 오래간다면 변호사들마저 그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
20여 년 전 법조 출입 초창기에 '미란다 원칙'이라는 다소 낯선 법률 지식을 알게 되었다. 법원 관계자에게서 보기 드문 판결이 나왔다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취재했던 바다. 경찰관이 범죄용의자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그 이유와 변호인 선임권, 진술 거부권 등을 고지했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아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경우였다. 경찰 영화에 많이 나오는 그게 바로 미란다 원칙이란 거였다. 수사 과정에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판결이다. 명색이 법조 출입기자가 기본적인 것도 몰라서야 되겠냐는 생각에 법률 상식을 다룬 책부터 샀다. 요새 부쩍 그렇게 법률 지식에 다가갔던 기억이 새롭다.
유명 법조인 출신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장관이 나란히 구속되는 것을 보고서는 그동안 가까이서 보아 온 일부 법조인의 생리 하나가 떠올랐다. 검사든 판사든 변호인이든 일부 법조인 중에는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유난히 짙다. 김 전 실장과 조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발부하면서 '범죄사실이 소명된다'고 이유를 밝혔다. 법 위반 문제가 이처럼 소명, 즉 입증의 문제로 나아가면 더욱 그렇다. 나의 범죄를 너희가 입증하지 못하면 나는 무죄란 인식이 굳어 있다. 김 전 실장이 특히 그 경우에 속한다고 느껴진다.
최순실도 김 전 실장도 특검 조사에 불응했던 지난 토요일에는 집안에 있는 몇 안 되는 법률 관련 서적을 빼놓고 이리저리 훑어보게 되었다. 잊고 있던 묵비권 얘기까지 나오니 그동안에는 보이지도 않던 법률 서적이 눈에 들어온 터였다. 대학 때 교양과목 이수를 위해 샀던 '법학개론'을 뒤적이다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맨 뒷장에서 난데없는 10만 원짜리 수표 3장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발행일이 20년이 다 된 것이었다. 그 수표는 어떻게 해서 그 책 속에 들어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꼭꼭 숨어 있던 것일까. 정말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최순실과 그들이 아니었으면 그 수표는 영영 눈에 띄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최순실과 그들에게 감사인사라도 전해야 하나. 혹시 은행 측이 기한이 오래전에 지난 수표여서 쓸 수 없다고 나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그때는 누구에게 조력을 구하나.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