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짜리 말타고 돈도 실력이라는 '가정주부의 딸'
컵라면 남긴채 숨진 비정규직 청년보니 '가슴 먹먹'
회사가 새 건물에 둥지를 튼 지 한 달이 다 돼가지만, 지하 주차장에 진입할 때면 여전히 핸들에 긴장감이 전해진다. 쇼트트랙을 연상케 하는 나선형의 난코스(?)를 최대 일곱 바퀴를 돌아내려 가야 하는데, 운전에 몰입하다 보면 마치 레이스를 펼치는 드라이버가 된 듯한 기분이다. 문제는 규정속도를 잠깐이라도 어길라치면 바퀴와 경계석의 마찰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바퀴의 스크래치는 늘어만 가니, 미숙한 운전실력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직 벽에 페인트 자국을 남기지는 않은 만큼, 드라이버로서의 기본 테크닉은 갖추었다고 자위해 본다.
그런데 스물을 갓 넘은 청년이 코너링을 그렇게 잘한다고 하니 수십년 경력의 운전자로서 부럽기 그지없다. 북악스카이웨이 길에 코너가 많고 요철이 많은데도 굉장히 '스무스'하게 잘 넘어갔고 코너링도 아주 좋았다는 것이다. 이 정도 실력이면 이 청년은 카레이싱계의 테크니션이자, 베스트 드라이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부러운 일이 또 있다. 이 청년의 이름 또한 아주 일품이라는 것이다.
이 청년을 서울경찰청 차장 운전병으로 발탁한 모 경위는 "임의로 뽑은 5명 가운데 그 청년의 이름이 좋아서 운전병으로 선발했다"고 밝혀 특검팀의 감탄사(?)를 자아냈다고 한다. 일찍이 코너링 실력과 운전병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갈파한 혜안에, 성명학적 근거까지 접목했으니 그 얼마나 치밀한 인재발굴의 전형인가.
더 나아가 이 청년의 사례는 세월에 묻혀버린 유머까지 소환하고야 만다.
우리나라 병역제도에 '방위병'이라는 보충역 제도가 있던 시절이다.
부모를 잘 만나 군대에 가지 않는 병역면제자는 이른바 '신의 아들'로 일컬어졌다. 6개월 방위병은 '장군의 아들', 18개월 방위병은 '사람의 아들'로 불리었다. 18개월 방위에 이르러서야 신의 영역에서 드디어 소시민 영역의 실질적인 '인간계'(?)로 넘어온 것이다. 그러면 군복무기간을 꼬박 채우는 현역병은 뭐라고 불렀을까? 바로 '어둠의 자식들'이다.
웃을 일 하나 없는 세상에 다시 쓴웃음이라도 짓게 만드는걸 보면, 코너링으로 시작해 성명학으로 귀결되는 이 '발탁론'은 그 어느 작가도 흉내낼 수 없는 창조적 스토리텔링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이 유머를 잇는 후속 버전이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코너링에 탁월하고 이름까지 좋은 운전병은 '민정수석의 아들'이다. 내친김에 조금만 더 '오버'해 보자. 수십억 원 짜리 말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돈도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자는 누구의 딸일까? 정답은 '평범한 가정주부의 딸'이다. 대통령이 직접 제시한 모범답안이니 믿을 수 밖에….
이들 아들과 딸은 지난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비정규직 청년과 동갑내기다. 허기진 배 때우지도 못한 채, 찌그러진 컵라면 하나 달랑 남겨 놓은 이 청년은 '민정수석의 아들'도, '평범한 가정주부의 딸'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슴이 더 먹먹하다.
/임성훈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