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천, 미추홀→매소홀→소성현→경원부→인주 거쳐 태종때 인천
수주→안남도호부 충선왕때부터 '부평'… 강화·옹진은 1995년 편입
인천광역시는 '원(原)인천'이라 불리는 지역과 '부평' '강화' '옹진' 등 개별적인 역사와 문화권을 가진 4개의 덩어리가 합쳐진 도시다. 인천은 조선 태종 때인 1413년 지명을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는 이유만으로 '정명(定名) 600년'이라는 단어로 묶을 수 없는 '다양성의 도시'이다. 그 점은 인천의 도시변천사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산을 중심에 둔 '원인천'은 주몽의 아들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설화가 전해지는 지역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매소홀(買召忽)로 불렸고, 통일신라 때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소성현(邵城縣)이라 했다.
고려 현종 9년에는 지금의 부평·계양·서구 일대인 수주(樹州)에 포함됐다가 다시 분리돼 경원군(慶源郡)·경원부(慶源府) 등으로 승격했다. 조선 태조 때 이름을 인주(仁州)로 고쳤다가 태종 때 인천으로 바꿔 현재에 이르렀다.
원인천 지역은 1883년 개항 시기 그 중심이 문학동 일대에서 중구 제물포 지역으로 옮겨갔다. 1914년 일본 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천은 인천부로 재편돼 지금의 중구·동구로 축소됐다가 1930년대 이후 다시 남구·연수구·남동구 등으로 확장하면서 인근 지역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부평·계양·서구를 비롯해 경기 부천·김포 일부 지역은 고구려 때 도시를 형성해 고려 초 수주로 불렸다. 이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등을 거쳐 고려 충선왕 2년(1310년) 부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지역은 1914년 부내면·계양면·서곶면 등으로 쪼개져 새로 생겨난 부천군에 속했다가 1940년 부내면과 서곶면이 인천부로 편입돼 1968년 인천시 북구를 이뤘다. 1988년 북구에서 서구(서곶면)가 떨어져 나갔고, 김포군 계양면이 1989년 인천시 북구로 들어왔다. 북구는 다시 1995년 부평구와 계양구로 나뉘었다.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시로 편입된 강화군은 고려 때 39년간 몽골군의 침략을 피한 전시수도이자 조선 임금의 보장처(保藏處·왕이 피난하는 곳)였다.
고구려 때 혈구군(穴口郡), 통일신라 때 해구군(海口郡)과 혈구진(穴口鎭)으로 불리다가 고려 초기 강화현(江華縣)으로 바뀌었다. 고려 전시수도 때 강도(江都)로 불린 것을 제외하면 계속 강화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군사요충지 역할을 했다.
옹진군은 북한 황해도 강령과 해주 일부, 옹진반도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고구려 때 옹천(甕遷)이었다가 고려 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현재의 행정구역상 인천시 옹진군은 모두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재편됐기 때문에 본래의 북한 황해도 옹진과는 전혀 다른 지역이다. 한국전쟁 이후 서해 5도 지역만 있던 남한의 경기도 옹진군은 1970년대 인천 앞바다의 여러 섬을 합쳐 1995년 인천시로 소속됐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인천광역시, 도시 변천 과정은?
원인천·부평·강화·옹진 '4개의 퍼즐' 다양성 맞추다
입력 2017-02-26 22:30
수정 2017-02-2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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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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