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유도 황소
지난 1997년 1월 17일,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간 남북 모두의 발길이 끊겼던 비무장지대 유도에서 우리 해병대의 '황소 구출 작전'이 펼쳐졌다. 이날 해병대원들은 쓰러진 소를 보트에 싣고 다시 김포군 월곶면 보구곶리 철책선으로 돌아와 언론에 큰 관심을 끌었다. /김포시 제공

겨울철 먹이 찾지 못해 뼈만 앙상
지뢰 밟은 앞 발굽 피·고름 '처참'
해병대원들 4시간만에 구조·귀환
인천 국립동물검역소서 건강회복
'남한 색시'와 새끼 7마리 낳기도


한강하구 중립 수역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인도 유도(留島)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 모두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됐다.

정축년(丁丑年)이 막 시작되던 1997년 1월 17일,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간 남북 모두의 발길이 끊겼던 비무장지대 유도에서 우리 해병대가 투입된 '황소 구출 작전'이 펼쳐졌다. 이날 오전 민통선 지역인 김포군 월곶면 보구곶리 철책선 통문을 열고 해병대 청룡부대 수색대원 10여 명과 수의사 1명이 해안가 고무보트에 올랐다.

보구곶리에서 유도까지의 거리는 불과 200~300m, 북에서 떠내려온 황소를 뭍으로 구출하기 위해서는 지뢰탐지기까지 동원해야 했다. 혹시라도 북한군의 대응이 있을지 몰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보구곶리에서 출발한 지 불과 7분여 만인 오전 11시 30분 해병대원들은 유도에 닿았다. 한겨울 작은 섬 안에서 먹이를 찾지 못해 앙상하게 마른 상태로 해안가를 떠돌던 황소는 마취총을 맞고 이내 쓰러졌다. 해병대원들은 쓰러진 소를 보트에 싣고 다시 보구곶리 철책선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오후 3시, 작전 시작 4시간여 만이었다.

이 북한 소가 유도에서 처음 발견된 건 1996년 8월이었다. 그해 여름 김포와 인접해 있는 북한 개풍군에서 홍수가 났고 이때 떠내려온 황소로 우리 군(軍)은 추정했다.

당시 유정복 김포군수(현 인천시장)는 여름이 지나고 겨울철 먹이가 없어 아사 직전에 있던 황소를 구출하기 위해 해병대, 국방부, 유엔(UN)정전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어렵사리 입도 허가를 받아냈다.

당시 김포군 축산계장으로 근무하며 보구곶리 현장에서 구출작전을 지켜봤던 김무현(현 김포시 농업기술센터 농업정책팀장)씨는 "철책선 통문이 열리고 구출된 황소가 밖으로 나왔는데 왼쪽 앞 발굽이 지뢰에 잘려나가 고름과 피가 뒤섞여 나오고 있었다"며 "해병대원들과 같이 들어갔던 수의사가 압박붕대로 발굽을 감는 응급처치를 현장에서 했다"고 말했다.

뭍으로 나온 소는 곧바로 인천 서구에 있던 국립동물검역소(현 농림축산검역본부) 당하리 계류장으로 옮겨졌고 2월 10일까지 정밀진단과 격리치료를 받았다. 유정복 군수는 구출된 황소에 '평화의 소'란 이름을 붙였다.

건강을 되찾은 이 평화의 소는 김포군이 축사를 마련하는 동안에 축산농가에서 맡아 키우다가 11월 11일 김포군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로 옮겨졌다. 그 사이 체중도 구출 당시 350㎏에서 650㎏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이듬해인 1998년 1월에는 제주도에서 온 '남한 신부'를 맞았고 그해 11월 6일 첫 새끼를 낳았다.

김포시는 남과 북이 화합해 통일을 이루자는 염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자매결연 도시였던 제주도에 의뢰, 암소 1마리를 데리고 와 '합방'시켜 첫 새끼를 얻었다. 유정복 군수는 제주도에서 온 '신부' 암소의 이름을 '통일 염원의 소'로, 2세 수소는 '평화 통일의 소'로 지었다.

당시 김포군 농촌지도소에서 평화의 소를 돌봤던 이재준(현 김포시 농업기술센터 환경농업팀장)씨는 "북에서 온 황소와 남쪽에서 온 암소가 얼마나 금실이 좋았던지 매년 1마리씩 새끼를 낳았다"며 "모두 7마리의 새끼가 남과 북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김명호·김우성기자 boq7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