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해도 흐뭇한 '평화의 소 손녀'
지난 23일 오전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 '우응목장'.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진해씨가 평화의 소 핏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평화의 소' 손주 격인 2살배기 암소에 녹색 목줄 표식을 걸어놓았다. 이 암소가 평화의 소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유도서 처음 구출된지 20년째
손주격 암소만 남고 명맥 끊겨
혼자 맨 녹색 목줄 '자손' 의미
주인 이진해씨 "새 상징 되길"


1997년 평화의 소가 김포 유도(留島)에서 구출된 지 올해로 20년, 명맥이 끊긴 줄만 알았던 평화의 소 핏줄이 아직 남아 있음이 경인일보 취재 결과 확인됐다. 당시 이 소를 '평화의 상징'으로 만들겠다던 염원을 기억하며 평화의 소가 낳은 새끼의 새끼를 묵묵히 기르고 있는 농민도 찾을 수 있었다.

유도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평화의 소'는 이듬해 제주에서 건너온 암소와 짝을 지어 2006년 죽기 전까지 두 마리 사이에서 모두 7마리의 새끼를 얻었다.

'평화의 소'는 제주에서 올라온 암소 이외에는 짝짓기를 하지 않았다. 1998년 첫째 수소(평화 통일의 소)를 시작으로 1999년 둘째 암소, 2000년 셋째 수소, 2002년 넷째(수소), 2003년 다섯째(수소), 2004년 여섯째 암소, 2005년 5월 10일에는 막내 암소까지 거의 매년 새끼를 얻었다.

1999년 제 어미의 고향 제주도로 간 첫째 수소(평화 통일의 소)는 그곳에서 40~50마리의 후손을 남겼지만, '평화 통일의 소'와 그 핏줄까지 맡아 기르던 정현일(전 제주시 우도면 서광리 이장) 씨가 지난해 작고하면서 소들이 모두 처분돼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나머지 2~6번째 새끼 역시 김포시내 여러 축산농가에 넘겨졌지만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찾을 길이 없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이렇게 평화의 소가 세간의 관심 속에서 멀어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평화의 소' 핏줄은 굳건히 자라고 있었다.

'평화의 소'와 제주에서 온 '통일 염원의 소' 사이에서 2005년 태어난 7번째 막내 암소. 이 암소의 새끼가 현재 김포시 가현리에 있는 한 축산농가에서 크고 있다. 정확히 따지면 '평화의 소'의 새끼의 새끼, 사람으로 치면 '손주'에 해당한다.

지난 23일 오전,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 '우응목장'. 축사에 들어서자 50여 마리의 소가 울타리 밖으로 고개만 내놓은 채 목초를 뜯고 있었는데, 비슷하게 생긴 수십 마리의 소 중 유일하게 녹색 목줄을 감고 있는 암소 1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2살배기 그 암소가 주인공이었다. 우응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진해(64) 씨가 '평화의 소' 핏줄이란 것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걸어 놓은 표식이다.

이씨는 지난 2014년, 북에서 넘어 온 '평화의 소'와 제주도에서 온 '통일 염원의 소' 사이에서 낳은 7번째 막내 암소를 김포시의 한 축산농가에서 건네받아 길렀다.

당시 이 소의 나이는 9살 정도, 사람 나이로 치면 70~80살 되는 다 늙은 암소를 받아 사육했고, 이 암소는 우응목장에서 2015년까지 머물며 수소와 암소 각각 1마리씩을 낳았다. 이 중 암소 1마리가 지금까지 남아 사육되고 있다.

이진해 씨는 "당시 다 늙은 암소('평화의 소' 7번째 새끼)를 아무도 받으려는 이가 없었는데 통진두레놀이보존회('평화의 소' 유골 보관)에서 의미가 있는 소라고 계속 설득해 받아 기르게 됐다"며 "그 암소가 우리 축사에 와서 새끼 2마리를 낳았고 그중 1마리가 지금 녹색 목줄을 감고 있는 암소"라고 말했다.

2살배기 암소는 450㎏ 정도로 지난해 첫 새끼(수소)를 낳았다. 하루 2번에 걸쳐 사료와 목초 5~6㎏을 먹으며 잘 자라고 있다고 이 씨는 설명했다.

이 씨는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이렇게 '평화의 소' 자손을 기르고 있지만 이제 몇 년 더 지나면 명맥이 완전히 끊길 수도 있다"며 "우리 축사에 아직 '평화의 소' 핏줄이 남아 있으니 북에서 수소 1마리만 데려와 짝짓기를 시키면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제2의 평화의 소'가 될 수 있지 않겠냐"면서 활짝 웃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