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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은 오는 23일부터 다음 달 14일까지 광주 서구 쌍촌동 5·18 기념문화관에서 '5·18, 위대한 유산/연대' 전시를 연다. 영화 '택시운전사' 속 독일 기자의 실존인물인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항쟁을 기록한 영상과 갈무리한 사진, 나경택 전 연합뉴스 광주전남취재본부장과 이창성 전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목숨 걸고 기록한 보도사진 등 200여점이 선보인다. 사진은 이번 전시에 소개될 5·18 당시 항쟁의 기록. /5·18기념재단 제공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이 무기고를 탈취하고 교도소를 습격해 군이 집단 발포를 했다는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는 경찰의 공식보고서가 나왔다.

경찰은 시민들의 무장 시점이 조작된 점 등을 토대로 5·18 당시 최악의 학살로 꼽히는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에 대해 '자위권 확보' 때문이라던 신군부 주장을 반박했다.

전남지방경찰청은 11일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 경찰의 역할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폭동 진압설·북한군 개입설 등 5가지 조작·왜곡에 대해 설명했다.

경찰은 먼저 '일선 경찰서 기록과 근무자 증언을 조사한 결과 시민의 경찰관서 무기고 탈취보다 군 집단 발포가 먼저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당시 상황을 수기로 기록한 '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 문서와 관련자 증언에 따르면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는 1980년 5월 21일 낮 12시 59분께 시작됐다.

경찰은 이 문서와 1980년 6월 작성한 '무기피탈 관련 치안본부 감찰' 기록, 당시 근무 경찰관 증언 등을 토대로 21일 오후 1시 30분 나주 남평지서에서 최초로 시민의 무기 탈취가 있었다고 밝혔다.

군 당국은 그동안 시민이 21일 오전 8시 나주 반남, 오전 9시 나주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에 자위권을 발동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경찰은 "보안사가 보존 중인 '전남도경 상황일지'에 이 내용이 기록돼 있으나 당시 경찰이 보유하지도 않은 경찰 장갑차가 피탈됐다는 내용이 있고 문서 제목과 글꼴도 경찰이 사용하던 양식과 달라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전남 경찰은 내부 문건 작성 시 '전남경찰국'이라고 표기해왔으나 이 문건은 '전남도경'이라는 표현을 썼고 한자 역시 경계할 경(警) 대신 공경할 경(敬)으로 잘못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어 "19일 광주권 경찰관서 무기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소산 조치를 했으며 21일 오전 5시 13분 광주세무서에서 M1 17정을 탈취당했지만 실탄은 탈취당하지 않아 무장으로 볼 수 없다"며 "군 발포가 이미 5월 20일 밤 광주역 부근에서 이뤄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어 군의 '자위권'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5월 21일 시위대의 교도소 습격설 역시 공격이 없었다는 당시 교도소장 등의 증언과 무장한 공수여단이 경계를 서고 있었던 점, 인근 경찰서에 피해가 없었던 점 등으로 볼 때 시민의 이동을 오인·과장하거나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5·18 직전 광주시내가 학생 시위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다는 신군부 주장도 정면으로 반박했다.

경찰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이어졌으나 5·18 직전인 5월 16일 경찰 보호 속에 평화로운 가두시위가 있었고 5월 17일은 대부분 진압부대가 야유회를 가거나 휴식하는 등 평온했다"고 설명했다.

공수부대의 과격 진압이 특정한 지시 없이 학생·시민들의 공격에 흥분해 우발적으로 이뤄졌고 이것이 광주항쟁으로 이어졌다는 신군부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경찰은 "치안 당국인 경찰과 협의 없이 경험 없는 흥분된 공수부대를 시내 작전에 투입해 1∼2시간 만에 300명 이상을 검거하는 등 무차별적인 폭력을 자행하고 시가지 투입작전 이전 공수 1개 여단을 증파한 점 등에 대해 의도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북한군 수백 명이 광주에 잠입해 시위를 주도하고 사라졌다는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서는 당시 정보·보안 형사와 현장 경찰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증언에 참여한 경찰관들은 "북한군 첩보는 A급 공작 실적인데 이를 그냥 넘어갈 대공형사가 있겠는가"라며 "600명이나 내려왔는데 경찰이 모를 수도 없고 나중에라도 파악됐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입을 모았다.

경찰은 계엄군 철수 이후 광주를 무장시민군에 의한 살인과 약탈 범죄가 판치는 무법천지인 것처럼 묘사한 국방부와 국가안전기획부 기록, 일부 언론 보도도 조작·왜곡된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학운동 일가족 3명 사망'은 군과 안기부가 무장 폭도(시민군)의 총격 범행으로 기록했고 일부 신문도 이같이 보도했으나 실제로는 가족 간 원한에 의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80년 5월 18∼27일까지 열흘간 경찰 강력사건 기록은 서부서 관내 2건뿐이었고 당시 강력사건 재판 기록 역시 3건뿐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