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5개월 동안 법정에서 당사자와 호흡하며 재판만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겠습니다"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신임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김명수 당시 춘천지법원장은 언론과의 첫 대면에서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양승태 사법부에서 자행된 각종 '사법행정권 남용'(사법농단)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고, 강력한 사법제도 개혁으로 사법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는 국민 요구를 성실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25일 취임 1주년을 맞는 김명수 사법부에 대한 법원 안팎의 평가는 혹독하다.

사법행권 남용의혹 검찰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사법부에 대한 검찰의 지나친 수사행태로부터 법원조직을 보호할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동시에 나온다.

사법제도 개혁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국민의사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과 법원 구성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성급한 개혁추진으로 조직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모순된 지적이 공존하는 것이다.

김 대법원장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진상 규명을 지지하는 쪽이든 반대하는 쪽이든 그의 행보에 만족하지 못한다.

사법제도 개혁도 마찬가지다. 젊은 판사들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판사들은 김 대법원장의 개혁의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욱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는 반면, 고참 판사들은 조직논리를 들며 김 대법원장이 법원 밖 세력의 '사법부 흔들기' 빌미를 줬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 같은 '진퇴양난' 상황은 김 대법원장의 신중한 태도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철저한 진상규명도 필요하지만 의혹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원론적 태도가 분열된 법관사회에서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 한 관계자는 "진상규명과 사법개혁이라는 같은 상황을 두고 한쪽에서는 '모자라다', 다른 쪽에서는 '지나치다'며 비판하고 있다"며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겠다는 김 대법원장의 태도는 '우유부단'이나 '침묵'으로 지적받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른 쪽에서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현 수준으로까지 밝혀진 것도 김 대법원장의 강력한 의지 덕분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취임 직후 양승태 사법부 시절 실시된 '진상조사위원회' 조사를 두고 '셀프조사'라는 지적이 제기되자 추가조사위를 꾸려 2차 조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진상조사위 조사에서는 조사대상에서 제외됐던 법원행정처 컴퓨터에 대한 조사가 처음으로 이뤄졌고, 감춰져 있던 각종 '판사사찰' 및 '재판거래' 의혹이 드러날 수 있었다. 검찰이 수사에 나서는 결정적 계기가 된 3차 조사결과도 김 대법원장의 강한 규명 의지에 따라 '특별조사단' 구성되면서 가능했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추가 문건제출과 주요 피의자 영장기각을 두고 검찰과 갈등을 빚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김 대법원장의 신중한 태도가 오히려 검찰 수사의 공정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이 시작되면 핵심증거인 법원행정처 문건의 증거능력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의 치열한 법리논쟁이 예상되므로 법원 입장에서는 문건제출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며 "영장기각도 각 영장판사의 객관적 판단에 맡기고 대법원은 절대 관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공정한 수사·재판 결과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이 사법부 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지금의 혼란은 무분별한 사법행정권 남용행위를 일삼은 양승태 사법부의 책임일 뿐 이를 김명수 사법부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사법제도 개혁도 일각의 비판과 달리 역대 어느 사법부에서도 없었던 속도로 개혁작업을 이뤄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 후 한 달 만에 '사법제도 개혁을 위한 실무준비단'을 구성해 본격적인 사법제도 개혁 준비를 마친 후 올 1월 외부인사로 구성된 사법발전위원회를 꾸려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나섰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진원지인 법원행정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안을 마련한 것은 물론 법관인사 이원화 등 법관인사제도 개혁안과 사법행정권에 대한 일선 판사들의 의사반영 방안 등으로 대법원장의 막강한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는 모습도 보였다.

또 다른 재경지법의 부장판사는 "역대 어떤 대법원장도 이 정도로 사법제도 개혁에 의지를 가지고 속도를 낸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백가쟁명 방식으로 제시되는 사법제도 개혁안에 국민의사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