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대표적인 예가 '다산 아트홀'을 '사암 아트홀'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이후 조안면 마재마을에 위치한 다산유적지 등 다산이 들어간 명칭에 대해서도 '사암', '열수' 등 새로운 명칭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흔히 써오고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다산'이라는 호보다 '사암'이나 '열수'라는 호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먼저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유적지에 가면 생가인 여유당 옆에 자찬묘지명이 세워져 있다. 자찬묘지명이란 정약용이 회갑을 맞은 1822년(임오년·순조22년)에 스스로 묘지명을 자찬하였다는 뜻으로 평생 저서의 대의와 목록을 자세히 열거한 것이다.
"이 무덤은 열수(洌水) 정약용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이요, 자는 미용, 또 다른 자는 용보라고도 했으며, 호는 사암이고 당호는 여유당인데,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고 시작한다. 여기에서 정약용 선생이 생전에 '사암'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하였음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사암의 자손은 매우 귀한데 9남매를 낳아 2남 1녀만을 남겼다. 두 아들 중 큰 아들인 학연의 후손이고 사암에게는 4대손이 되는 정규영 선생이 1921년에 펴낸 '사암선생 연보'에도 정약용 선생이 여러 호 중에서 '사암'을 가장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고 역주자인 송재소 박사가 서문에서 밝혔다. 그 외에도 정약용 선생의 7대손인 정호영(EBS미디어 대표) 씨가 모 연구단체와 한 인터뷰에서도 "정약용 선생이 자신을 다산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게 정설"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정약용을 연구한 학자 중 최익한이 당시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제목으로 총 65회 연재하면서 그의 사상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소화해냈다(그 연재물을 송찬섭 박사가 2016년 동명의 제목으로 엮고 간행). 그 내용 중 정약용 선생의 아호에 대한 부분을 논하면서 '사암'이 그의 대표적인 호라고 하면서 "선생의 불후 대업인 저작의 중요한 부분이 다산서옥 11년간의 산물이라 다산이 선생의 대표적 아호가 되어 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약용 선생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산'이라는 호가 널리 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약용 선생은 40세이던 1801년에 시작된 유배가 1818년 57세 되던 해 가을에 해배되었다. 유배 시절 18년 중 그의 나이 47세부터 강진군 다산초당에 머물렀고 다산초당이 위치한 거지명(居地名)이 다산이라 하여 후대들이 '다산'이라 칭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선생이 손수 작성한 전집에 '여유당집', '열수집', '사암집' 등의 제호가 있으나 '다산집'은 없다.
해배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주로 '열수(한강을 뜻함)'를 사용하였는데 그의 정신적 동반자이며 학문적 벗이라 칭한 둘째 형 정약전의 호가 손암(巽庵)이고 그에게 천주문물에 눈을 뜨게 한 이벽의 호는 광암(曠菴)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가 가장 선호하였던 호는 사암(俟菴)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더라도 생전 정약용 선생이 사랑한 호는 '사암'또는 '열수'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후대에 자신의 저술이 실천될 것'을 기대하는 선생의 뜻을 기려 '다산'대신 '사암(사암 : 기다릴 사(俟), 암자 암(庵), 백세 후 나를 알아주는 이를 기다린다는 뜻)'이라 칭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종우 지역사회부(남양주) 기자 ljw@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