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노트북] 숫자로 파악할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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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숫자로 파악할 수 없는 것 지면기사

    한 달 전 화재가 발생한 인천 서구 한 빌라를 찾았다. 검게 그을린 외벽과 코끝을 찌르는 탄내가 화마의 잔혹함을 떠올리게 했다. 화재가 난 집에는 방학을 맞아 혼자 시간을 보내던 열두살 초등학생이 있었다. 아이는 화재로 중상을 입은 후 결국 세상을 떠났다. 화재 흔적보다 눈에 띄었던 것은 우편함에 가득히 쌓인 공과금 더미였다. 공과금 고지서 사이로 전기·가스요금 체납을 알리는 공고문이 보였다. 공과금 체납은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었다. 가정 내에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가정 내 위기 징후를 알리는

  • [노트북] 한 달 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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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한 달 전 기억 지면기사

    한 달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1928~2025)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더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여성들이 없도록 앞장서온 길 할머니였다. 길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기사 제목에는 ‘7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부연 설명이 따라붙었다. 그중 한 사람인 이용수 할머니를 길 할머니의 빈소에서 뵀다. 대구에 거주하는 이 할머니는 어린 시절 같은 고초를 겪은 벗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인천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 할머니가 조문을 마치고 빈소 밖으로 나올 때까지 ‘어떤 질문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

  • [노트북] 착하지 않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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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착하지 않은 글 지면기사

    ‘정의롭다’는 말은 위험하다. 특히 직업이 기자라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기자는 사회운동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보이는 ‘정의로운 기자’라는 꾸밈말은 ‘기레기’만큼이나 선동적이다. 언론은 단지 정의를 ‘추구’할 뿐이다. 방점은 분명 뒤에 찍힌다. 대중은 종종 기사를 통해 ‘정의로운 편’에 속했다는 효능감을 얻고 싶어 한다. 누구도 가해자로 규정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선악 구도가 명확한 기사일수록 독자는 활자를 읽기만 했을 뿐인데도 도덕적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기사는 때로는 세상을 흐리게 만든다. 파주 용주골 성노동자 여

  • [노트북] 경기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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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경기도지사 지면기사

    윤석열 대통령이 석방됐다. 체포된 지 52일만이다. 그의 석방으로 대한민국 정치의 불확실성은 커졌다.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한국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한층 더 격화됐다. 여당은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야당은 심우정 검찰총장을 공수처에 고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여야 간 비판 강도는 비난에 가까울 정도로 거세졌고 극렬 지지층의 목소리는 다수를 대변하듯 광장에 울려 퍼지고 있다. 이를 중재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더욱 부추기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가운데 조기 대선을 노리는 대권 주자

  • [노트북] 당신의 집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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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당신의 집은 안녕하십니까 지면기사

    지하주차장 진출입구 높이가 기존 2.7m에서 2.3m로 줄어 택배차량이 출입할 수 없다. 오피스텔 일부층은 층고가 1.3m 감소했고, 실내 공간 면적이 10㎝ 이상 축소된 가구도 있다. 건설사가 입주업무를 시작한 지 6일쯤 됐을 땐 원인 모를 누수가 발생, 지하주차장이 물에 잠겼다. 이 사례는 여러 현장에서 발생한 하자 모음이 아니다. 대방건설이 시공한 ‘동탄역 디에트르 퍼스티지’ 오피스텔에서 벌어진 일이다. 동탄역 디에트르 퍼스티지는 대방건설이 2021년 분양한 대규모 복합주거단지다. 지하 6층~지상 49층, 5개 동 규모다. 4

  • [노트북] 고교학점제 안착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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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고교학점제 안착을 기원하며 지면기사

    4일 전국의 학교가 2025학년도 1학기 개학을 맞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학생들로 전국의 학교에 생기가 도는 시점이 바로 이때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그 어느 개학일보다 긴장하고 있다. 올해부터 교육부가 추진하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되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수강 신청을 하는 개념과 비슷하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게 과목을 선택해 이수하고 192학점 이상을 취득하면 졸업하는 제도다. 학생들에게 폭 넓은 수업 선택권을 보장하고 자신의 진로를 미리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고교학점

  • [노트북] 반가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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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반가운 소식 지면기사

    “괜찮아 보이는데… 잠깐, 거기 수유실 있어?” 가족끼리 시간 보낼 곳을 찾다보면 이렇게 ‘수유실의 벽’을 넘지 못하는 곳들이 꽤 있다. 아이 기저귀를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못 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물론 주변 눈치를 무릅쓰고 개방된 공간에서 기저귀를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했다가 ‘무개념 부모’로 찍혀 각종 커뮤니티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 이런 이유로 하나둘씩 거르다 보면 결국 가는 곳은 대형 쇼핑몰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을 찾던 전시장이나 공연장을 가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 몰린

  • [노트북] 강산이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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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강산이 한 번 지면기사

    2010년대 초, 양평군에 발을 처음 디뎠을 때를 기억한다. 경상도 토박이로 살며 부산의 인프라에 적응해 있던 내게 남한강과 용문산, 큰 마천루 하나만이 솟아 있던 읍내는 이십대 중반에겐 꽤 생경한 풍광이었다. 이후 기자 일을 시작하고 지역의 고질적인 문제를 글과 제도로 직접 마주했을 때 나도 모르게 헛헛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역 곳곳이 규제로 가득 차 있어 기업이 들어오지 못하고, 그로 인해 지역의 미래인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것을 숱하게 보며 이곳이 지역소멸 딱지를 떼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 또한

  • [노트북] 온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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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온정주의 지면기사

    “‘온정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청렴하게 운영하겠습니다.” 제9대 인천시의회가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 진행했던 윤리특별위원회 소속 모 의원 인터뷰 당시 발언이다. 윤리특별위원회는 비상설 위원회로 의원들이 이른바 갑질이나 음주운전, 성 비위 문제 등 청렴·품위 유지 의무를 위반했을 경우 한시적으로 활동한다. 윤리특별위원회 위원들은 동료 의원을 감사·감찰하며 문제를 일으킨 의원의 징계나 자격 심사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당시 기자와 인터뷰한 윤리특별위원회 소속 해당 의원은 온정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높은 도덕적 기준을 바탕으로 의회를 청

  • [노트북] 나는 무사히 장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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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나는 무사히 장가갈 수 있을까 지면기사

    평생 모아둔 돈을 전부 쓰고 있는 요즘이다. 올해 결혼을 앞두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적금 들며 차근차근 모은 돈도, 여기저기 알아보며 소소하게 주식으로 번 돈도 눈 녹듯 사라졌다. 남들 다 하는 것, 우리는 따라가지 말자고 예비신부와 분명 서로 다짐했건만 ‘인생 단 한 번뿐인 결혼’이라는 웨딩 업체들의 유혹에 금방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웨딩홀, 드레스, 예물, 가구 등등 애당초 계획했던 예산을 아득히 넘어버렸지만 선택하고 지출해야 할 것은 아직 터무니없이 많이 남았다. 평생 살며 수백만원을 일시불로 지출할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