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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실무자로 지목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0월28일 검찰 구속 후 첫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윗선'에 해당하는 전직 고위 법관들이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발뺌하거나 "후배 법관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며 하급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식이다.

대부분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한 법원행정처 심의관들과는 상반된 태도다. 법조계에서는 현직 시절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전직 고위 법관들이 '폭탄 내던지기'에 가까운 책임 회피로 본격적인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번 의혹 사건의 '키맨'으로 꼽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달 15일 첫 검찰 조사를 받을 때만 해도 그가 법원행정처장 이상 윗선의 범행을 어느 정도는 털어놓을 것이라는 관측이 없지 않았다. 수사 초반 자신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만 발부되자 주변에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데다, 소환 조사 이후 구속영장이 청구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번 사태의 책임을 분산시킬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임 전 차장은 그러나 네 차례 소환 조사에서 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일부 혐의는 문건을 작성한 심의관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사실관계는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부적절하지만 죄는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구속된 뒤 그의 변호인은 "법리보다 정치적 고려가 우선된 부당한 구속"이라며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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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는 박병대 전 대법관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 전 차장의 직속 상관이었던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좀 더 적극적인 부인 전략을 썼다. 법리논쟁 대신 "업무는 (법원행정처 담당) 실장 책임 하에 하는 것"이라며 사실상 임 전 차장 이하 후배 판사들에게 책임을 넘겼다. 옛 통합진보당 관련 재판에 개입한 의혹에는 "억지로 (재판 절차나 판결을) 바꾸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박 전 대법관은 "원론적이고 정당한 지시였다"는 주장도 했다. 직권을 남용해 부당한 업무를 시키지 않았지만, 후배들이 '과잉 충성'을 하는 바람에 사법농단 사태가 벌어졌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의 후임 법원행정처장인 고영한 전 대법관 역시 혐의를 인정하는 입장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법원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해석도 한다. 자신이 혐의를 인정할 경우 곧바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까지 책임이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수사 확대를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법리에 밝은 이들이 자신의 혐의를 최소화하려는 단순한 전략을 쓰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하관계에 있는 지시자를 모두 직권남용 혐의의 공범으로 판단한 검찰의 수사계획을 읽고서 책임을 아래쪽으로 떠밀고 자신은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윗선'의 개입을 인정하는 순간 그 지시를 받아 실무자에게 전달한 자신도 공범이 되기 때문에 상급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는다는 해석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자신이 책임지고 가겠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조직 보호 차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는 순전히 형사사건 피의자이자 법기술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옛 법원 수뇌부의 이 같은 각자도생은 지난 6월 양 전 대법원장의 '놀이터 회견'에서 예견됐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의 3차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재판거래' 의혹이 제기되자 경기 성남시 자택 앞 놀이터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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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재임 시절 일어난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파문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여러 의혹 문건들에 대해 "제게 보고되지 않은 것도 많다. 머리로 다 기억할 수가 없다"라거나 "조치가 다 된 후 사후보고도 있다"며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전직 대법관들과 비슷한 해명을 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역시 "정책에 반대한 사람이나 특정 성향을 나타낸 법관에게 편향된 조치를 하거나 불이익을 준 적이 전혀 없다"고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2014~2017년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거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판사 10여 명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규정하고 인사에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만들어 양 전 대법원장의 결재를 받은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검찰은 다음 달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 등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그러나 전직 법원행정처장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혐의를 순순히 인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