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매개 사제의 연… 월북 후 종군화가
이념·친일 잣대로 회합까지 막아선 안돼
남북 문화예술 교류로 '상봉展' 이어지길
황영준의 작품은 북에서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보여줄 만큼 다양했다. 그 중국인 미술관 대표는 황영준의 수많은 연습 작품도 많이 갖고 있었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특히 황영준이 월북 하자마자 종군화가로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작품들도 있었다. 전투 현장의 최전선까지 들어가 화폭에 담았다. 길가에 길게 늘어선 부서진 차량 행렬 작품과 두 동강이 난 채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 작품은 묘하게 대비되었다. 비행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을 차량과 육상에서의 총탄 세례를 받고 추락했을 비행기의 모습이 서로 포개졌다. 못쓰게 된 3대의 탱크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모두 미군 탱크로 보였다. 포신을 땅에 처박고 있는 것, 양쪽의 궤도가 벗겨진 채로 있는 것, '824'라는 탱크의 고유번호까지 선명한 것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황영준은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만년까지 작품활동에 매진했다고 한다. 금강산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2001년에는 '금강산 화책(金剛山 畵冊)'이란 화보집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대단한 창작열이 아닐 수 없다. 그 '금강산 화책' 첫 장에 이렇게 썼다. '자연과 생활에 대한 고상한 미는 용암처럼 솟구치는 열정과 지향이 없이는 창조되지 않는다.' 용암처럼 뜨거운 예술혼이 있었기에 황영준만의 고상한 미가 창출될 수 있었을 게다.
황영준의 그림 세계를 열어젖혀준 이당 김은호의 예술관도 준엄했다. 인천관립일어학교에서 수학한 이당은 측량기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고서를 베끼는 일을 하게 되면서 빼어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묘사력이 뛰어난 그에게 대표적 친일 세도가 송병준이 초상화를 맡겼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을 제작하는 등 당대 인물화의 대표작가로 떴다. 후진을 양성함에 있어서 개인의 품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고 한다. 이당 또한 세상 뜨기 직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을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열정이 드높았다.
황영준은 2002년 남쪽에 두고 온 가족들과 상봉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그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황영준과 이당이 인천을 고리로 하여 연결된다고는 하지만 이당은 여전히 친일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문제가 있고, 황영준은 이념적 잣대로 봤을 때 월북작가란 색깔이 씌워질 수 있다. 이들 문제가 남북으로 갈라진 사제간의 회합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당 김은호와 화봉 황영준, 이 두 거장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남북의 문화예술 교류가 이당과 화봉의 상봉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