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100년전 그날처럼 삼일절을 하루 앞둔 28일 오후 수원시 화성행궁광장에서 열린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 기념 수원시민문화제' 사전연습에서 참가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그날의 함성을 재현하고 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남양주 진접·평택 진위·용인 원삼
마을주민 수백명 시위 자발적 참여
일부 보통학교 학생들이 이끌기도

보훈처 '수형인 전수조사' 명부만
"숨어지낸 아버지, 훈장도 못 받아"
독립운동 유공, 업적확인 과제로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 주민 116명, 평택 진위면 봉남리 15명, 용인 수지 머내 16명'.

1919년 봄, 마을 주민 스스로 이 땅의 독립을 외쳤으나 100년의 시간에 묻힌 '경기도 숨은 독립운동가'들이 숨 쉬는 땅이다.

국가보훈처가 전국 읍·면 문서고를 조사해 발표한 '일제강점기 수형인 명부 전수조사'에서 발견된 이들 147명은 모두 한 마을 주민이지만, 수형자 명부만 확인됐을 뿐 업적은 어디에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받지 못했다.

경인일보는 평생 지역사를 연구한 향토사학자와 마을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역사발굴에 매달린 교사들을 통해 이들 행적의 실마리를 더듬어 봤다.

■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

= 봉선사가 시발점이다. 향토 사학자 권광식(81)씨는 "봉선사 승려 김성숙(김성암)이 서울 3·1운동을 전해 듣고 마을에 전파했다"고 말했다.

봉선사 내 종무소는 시위에 쓰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든 장소다. 3월 24일 진접면 금곡리에서 400여명이 만세 시위에 나섰고, 헌병의 발포로 주민 1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29일, 진접면 중촌리에서 200여 명 주민들이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고 김성숙 등이 만든 선언문이 진접면 주민들에게 전해졌다.

부평리 주민 100여명도 이재일의 주도로 3월 31일 광릉촌 자갈바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주일여간 진접지역 만세운동은 700여명 주민들이 참여한 대대적인 만세시위였고, 대부분 농민이었다.

현재 진접중학교 인근 한 귀퉁이에 '3·1운동기념비'가 있다. 권씨는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중요하지만 3·1 정신 고취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진접읍 3·1운동기념비는 봉선사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평택 진위면 봉남리


= 1919년 3월 31일, 당시 지명인 진위군 북면 봉남리에서는 주민 5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북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에서 독립을 외쳤다.

당시 '매일신보'에는 성난 시위대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을 끌어내 수비병 경관 일당이 자동차를 몰아 현장을 와해했다고 써있다.

시위는 유동환, 김봉희, 최구홍, 박성백, 전영록, 유만수 등이 주민들과 미리 만든 구 한국기를 흔들었고, 북면 각 마을을 천천히 돌며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특히 시위대를 이끈 것은 진위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진위초등학교 나경훈(34)교사는 "1919년 3월 18일 진위공립보통학교 학생 20명이 진위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주민들과 합세해 21일, 31일, 4월 1일에 연달아 시위를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평택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평택의 독립운동가 조사 발굴 사업을 벌여 결과집 발표를 앞두고 있다.

■ 용인 원삼면 좌항리


= 학도병 전우회 경기남부지부장인 이대희(86)씨가 아버지 '이병헌'이 좌항리 주민들과 벌인 3·1운동 이야기를 전했다.

양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병헌은 졸업생, 좌항리 이장, 주민 등 100여 명과 함께 주재소 앞으로 달려갔다. 난곡리 천주교회 신도들도 참여했다.

이씨는 "아버지가 시위에 참여했다 일제에 쫓겨 인천으로 갔고 가족들과 떨어져 숨어 지냈다. 아버지 친구 김영달은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된 것을 인정받아 대통령 훈장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서훈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