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화마가 할퀴고 간 고성·속초 등 강원도 지역 곳곳의 피해는 '국가재난' 그 자체였다.
5일 오후 수원시에서 3시간 가량을 내리 달려 고성군 원암리 일대로 진입하자, 의도치 않게 코가 먼저 움찔댔다.
이 지역을 둘러싼 울창한 숲이 뿜어내는 '봄 내음'은 매캐한 타는 냄새가 대신했고,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부터 취재차량 옆으로 지나쳐가는 들판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날 오후부터 고성군 원암리에서 시작된 화재는 사람이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의 강풍을 타고 인접 지역인 속초 등으로 퍼져나갔다. 날이 밝고, 바람이 잦아들면서 헬기 투입 등 본격적인 소방의 화재진압 작전으로 오후께 고성·속초 일대 불은 대부분 잡혀가는 상황이었다.
최초 발화지였던 원암리는 특히 피해가 심각했다. 이곳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에 타지 않은 집은 행운"일 정도다.
실제 원암리 한 마을은 주택 절반 정도가 불에 탔다. 단순 불에 그을린 정도가 아니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린 집이 대다수였고, 이 정도 피해에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졸인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전날 밤의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손사래 쳤다.
임시거처로 마련된 마을회관에서 휴식을 취하던 추인수(81) 할아버지는 "창문 밖이 빨간불로 번쩍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추 할아버지는 "잠옷 바람으로 TV를 보고 있는데, 별안간 밖이 번쩍였고 불이 난 줄 알았다"며 "이러다 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부인과 함께 버선발로 뛰쳐나갔다"고 설명했다.
올해 83살인 이모 할아버지는 "어젯밤 느낀 공포는 털이 난 뒤 처음 느껴보는 공포"라고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부인과 함께 잠을 자다 옆집에서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대피했다"며 "아들 친구의 차를 얻어 탔는데, 불이 퍼지는 속도가 차량 속도보다 빨랐다"고 회상했다.
'고성→속초', 불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진 경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유독 '폐차장'들이 이번 화재로 큰 피해를 봤던 사실을 확인했다. 바람에 날린 불티가 폐차장 바닥에 흘러 있던 기름과 닿아 불이 붙으면서 대형화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속초시 교동의 한 폐차장은 이날 새벽까지 계속된 불로 차량 수백 대가 전소할 정도로 피해를 봤는데, 해당 폐차장이 130t 규모 가스충전소와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했던 것이다.
김명회 영동가스 과장은 "가스가 들어있는 탱크 옆과 뒤, 사방에서 불이 타올랐다"며 "소방이 도착해 진화작업을 하기 전까지 잠시 바람이 멈칫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죽음의 공포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현실의 막막함만 남은 듯 했다.
속초시생활체육관, 고성 천진초등학교 등 대피소에서 만난 이재민들은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이재민 137명이 모인 고성 천진초에서 만난 김근남(76) 할머니는 "남편이 평소에 먹던 심장약 등 약과 내가 먹던 혈압약까지 남김없이 모두 불에 탔다"며 "시집와 53년 간 살던 집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살 도리가 없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에서 1년 간 휴양차 고성 용천리에 잠시 내려왔던 이모(62)씨는 "아직 이재민들에게 피해구제 방안에 대한 설명이 없다"며 "당장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이재민들이 느끼는 불안감 해소를 위해 빠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화재로 불에 탄 산림은 고성·속초 250㏊, 강릉 옥계·동해 망상 250㏊, 인제 25㏊ 등 525㏊로 집계됐다. 여의도(290㏊)보다도 넓은 면적이 피해를 본 것이다. 이 불로 1명이 사망하는 등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4천6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한 정부는 현재 이 지역에 대한 '특별재난지역' 지정을 검토 중이다.
고성·속초/배재흥기자 jhb@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