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법 제정전까진 女만 처벌
협박·위자료 받는 수단으로 악용
불륜 조장 우려 결국 기우에 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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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간통죄 규정이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불륜이 조장된다"거나 "사회가 문란해질 것"이라는 등 세상이 발칵 뒤집힐 듯한 반응이 쏟아졌다.

하지만 헌재 결정 이후 통계상으로 이혼이 급증하지도 않았고, 불륜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산하지도 않았다. 간통죄 폐지는 우리 사회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레 변화한 국민의 성의식을 뒤늦게 법에 반영한 결과다.

유교 이념으로 통치되던 조선시대는 물론 근대로 접어든 일제강점기에도 간통죄는 국가가 처벌했다. 이때까진 여성의 죄만 물었다.

해방 이후인 1953년 9월 국회가 형법을 제정하면서 간통죄는 남녀 모두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1953년 7월 국회 속기록을 보면, 방만수 국회의원이 여성만 처벌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남녀 모두 죄를 묻는 간통죄 규정은 당시 제적의원 110명 가운데 과반수인 56명보다 딱 1명이 많은 찬성 57명으로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정비석이 1954년 쓴 장편소설 '자유부인'은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서 가정이 깨질 뻔한 주부가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복귀한다는 내용으로, 여전히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당시 사회상을 가늠할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을 비롯한 1920~1930년대 여러 문학작품을 보면 그 시대 인천 월미도가 불야성을 이루는 불륜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형벌로 책임을 물었던 간통이 6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개인이 책임지는 문제로 인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오히려 간통죄 고소가 협박이나 위자료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됐다. 경찰이 증거수집을 위한 카메라를 들고 남녀가 있는 모텔을 급습하는 진풍경이 이어져 왔다.

그사이 성에 관한 국민적 의식은 국가가 '이불 속'까지 단속해선 안 된다는 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전통적인 성문화와 결혼관을 비틀어 표현한 문학이나 영화·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간통죄로 수사기관에 입건된 사건은 2000년 5천617건에서 2010년 1천698건으로 불과 10년 만에 70% 가까이 줄었다. 헌재는 1990년부터 2015년까지 5차례에 걸쳐 간통죄의 존폐를 판단했고, 결국 변화한 시대상을 받아들였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었던 거였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